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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반죽의 형상」,『분홍 리본의 시절』

150쪽/ N에게 말은 안했지만, 올해에도 나는 여름휴가가 시작되기 전부터 긴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것을 과연 휴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휴가의 예감은 결투의 예감처럼 끔찍하고 달콤하다. 모욕에 결투로 응하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그 깨끗한 변제에 대한 향수는 인류의 정신 속에 면면히 남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결투는 모욕을 청산하...

권여선, 「약콩이 끓는 동안」,『분홍 리본의 시절』

102쪽/ 죽음을 앞둔 사람이 곰곰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리라는 생각, 그 사람의 눈앞에 지나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리라는 편견은 참으로 낭만적인 상상이었다. 살아갈 날이 충분할 때에만 무언가를 열심히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중요했다. 미래가 적은 사람들에게는 과거나 기억도 적었다. 상욱이 이제껏 지켜봐온 노인이나 폐인들은 집요하게 현재적이었다. 죽음...

권여선, 「분홍 리본의 시절」,『분홍 리본의 시절』

72쪽/  전화를 끊고 나는 수림이 정돈을 한답시고 엉망으로 꽂아놓은 시집을 죄다 뽑아 내 관념의 질서에 맞게 차근차근 다시 꽂았다. 마지막 시집을 꽂으면서 문득 나는 나 자신이 부도덕하다고 느꼈다. 그 느낌은 선배가 자신의 기질 자체가 공포스럽게 느껴진다고 하던 때의 느낌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순간 툭 하고 뭔가 나를 치고 지나갔다. 아니 내...

권여선, 「가을이 오면」,『분홍 리본의 시절』

10쪽/ 좀처럼 음식을 남기지 않는 그녀가 오직 손대지 않는 것은 미끌미끌한 미역국이나 미역초무침뿐이었다. 미역 건더기의 느낌은 흔히 딸의 행위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어머니들이 딸에게 던지곤 하는, 미끈거리고 천덩거리는 바로 그 눈빛의 질감이었다. 딸의 약점을 놓치지 않는 빈틈없는 어머니란 딸에게 얼마나 크나큰 재앙인가.*그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

오정희, 「옛우물」

 우리는 누구나 가엾은 한 여자의 가랑이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태어난다. 그리고 익히 알고 있는 길을 걸어가듯 새앵 속으로 한 걸음씩 옮겨 놓는다. 삶에 대한 상상력이란 대개의 경우 지나치게 황당하거나 안일하다. 묘지에 갔을 때 사람의 생애란 묘비에 적힌 생몰 연대 이상이라거나 그 이상이 아니라는 상반된 느낌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지만 간단한 생몰...

김애란, 「서른」

292쪽/ 그래서 사실 오늘 언니가 8년 동안 임용이 안 됐었단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어요. 8년. 8년이라니. 괄호 속에 갇힌 물음표처럼 칸에 갇혀 조금씩 시들어갔을 언니의 스물넷, 스물다섯, 스물여섯……서른하나가 가늠이 안 됐거든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 생기는 온갖 기대와 암시, 긴장과 비관에 대해서라면 저도 꽤 아는데. ...

김애란, 「큐티클」

208쪽/ 얼마 전 지방에 다녀왔다. 입사 후 처음 있는 출장이었다. 여행용 가방이 없어 부천 사는 친구에게 캐리어를 빌렸다. 친구는 자기 몸뚱이만 한 가방을 종로까지 끙끙대며 가져왔고 나는 그걸 수유까지 끌고 왔다. 없으면 아쉽고 사자니 아까워 빌린 건데, 가방을 돌려줄 때는 후회가 컸다. 짐 때문에 택시를 타고 부천까지 갈 수는 없었따. 그 값이면 ...

김애란,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167쪽/ 겨울밤. '빈 차' 등을 밝힌 택시들이 긴 불빛을 그으며 날아다닌다. 개개의 사연과 얘기, 그리고 노래를 실은 도시의 나비 떼가. 용대는 손님이 없나 창밖을 살피며 차를 몬다. 새벽녘 바람은 더욱 차가워진다. 용대는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낀다. 작년에 비가 엄청 왔을 때, 압구정에서 인천공항까지 가자고 한 손님이 있었다. 비행기가 곧 뜬다고 ...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발인은 내일 새벽이었다. 막차를 타지 않았으니 나는 아마 내일 거기 없을 터였다. 그 아이, 잠수를 참 잘했는데. 물속 깊이 사라졌다 어느새 저쪽에서 싱싱한 물고기처럼 튀어 오른 병만의 매끈한 몸이 떠올랐다. 우리 모두 그 애가 보이지 않으면 초조해하다 어느 순간 몸을 털며 짠—하고 나타면 감탄하곤 했는데. 한쪽 팔로 이마를 짚었다. 천장에선...

권여선, 「내 정원의 붉은 열매」

 그 방은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이미 사람이 살지 않는지 초록색 철문은 반쯤 떨어져 나갔고 주인집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철문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다 그만두었다. 다시는 혼자서 이 철문을 밀고 들어서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곧 허물어질 듯한 시멘트 담장 너머로 그 방의 닫힌 쪽문이 보였다. 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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