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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길모퉁이」,『비자나무 숲』

 몇 년 전인지 기억도 할 수 없는 시절, 상미와 나는 미용학원에서 돌아와 고시원 원룸에서 컵라면을 끓여 먹고 각자 자기 마네킹에 싸구려 가발을 씌우고 펌 약을 바르고 롯드를 말았다. 한밤중에 한 쌍의 치즈 빛깔 살결을 한 마네킹의 크게 뜬 눈과 붉은 입술을 보는 일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우리는 잠자기 전에 마네킹들에 드라이 보를 씌워 책상 밑에...

권여선, 「은반지」,『비자나무 숲』

 그 후로 오 여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울화가 끓어 견딜 수 없었다. 심 여사의 태도는 죄를 알려주지 않고 징벌부터 내리는 못돼먹은 신을 닮았다. 누구나 홀연히 떠남으로써 타인에게 신이 될 수 있었다. 오 여사의 남편도 그렇게 교통사고를 당해 훌쩍 떠남으로써 오 여사에게 신이 되었다.(…중략…) 한적한 시골 도로에는 지나가는 차가 한 ...

이장욱, 「밤을 잊은 그대에게」,『고백의 제왕』

 문득, 무슨 싸이버 보안업체인가에 다닌다던 젊은 환자가 떠올랐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는 이미 유명한 해커였다고 했다. 그는 한 정부기관의 전산망에 들어가서 하잘것없는 정보를 빼냈다. 그가 정보를 빼낸 이유는 물론 정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빼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검거되었다. 자기가 스스로를 경...

볼프강 보르헤르트, <도시>, 『이별 없는 세대』

 램프는 이따금 틱틱 소리를 냈다. 그리고 바람은 계속 단조로운 소리를 귓가에 울리며 지나갔다. 철로는 달빛에 반짝이며 차갑게 누워 있었다.  그때 사내가 램프를 흔들거리며 말했다. 삶이라고! 맙소사, 그게 뭐요. 냄새를 기억해내는 것. 문의 손잡이를 잡는 것. 서로 얼굴을 스치며 밤이 되면 머리에 빗방울을 느끼죠. 그것은 벌...

볼프강 보르헤르트, <민들레꽃>, 『이별 없는 세대』

 문은 내 뒤에서 닫혔다. 문이 사람 뒤에서 닫히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아주 잠기는 일도 또한 상상할 수 있다. 예컨대 집 문이라는 것들은 무언가 최후의 것, 닫히는 것, 넘겨주는 것 들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이제 그 문은 내 뒤에 밀려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함부로 닫아버릴 수 없는 두꺼운 문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볼프강 보르헤르트, <지나가 버렸네>, 『이별 없는 세대』

 허무 속으로. 달아날 골짜기가 없군. 도처에서 나는 나를 만났어. 주로 밤의 일이지. 하지만 탑이야 얼마든지 더 쌓을 수 있어. 사랑이라는 짐승이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지만 불안이라는 짐승이 그 뒤에 처녀와 그의 침대가 놓여 있는 창문 앞에서 짖어대고 있네. 문의 손잡이가 껄껄 웃는군. 탑이야 쌓을 수 있지. 뱃속에는 기아란느 짐승이 있고 가...

볼프강 보르헤르트, <이별 없는 세대>, 『이별 없는 세대』

 우리는 이별이 없는 세대다. 우리는 이별을 체험할 수도 없고, 또 체험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자칫 발길을 잘못 두면 거리를 헤매는 우리의 가슴에는 영원한 이별이 못박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아침에 이별을 보게 될 하룻밤을 위해서 우리의 가슴이 조마조마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이별을 극복해야 할 것인가? 그대들, 우리와는 다른 그대들...

볼프강 보르헤르트, <라디>, 『이별 없는 세대』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에게서는 눈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아주 싸늘했다. 아주 푸석하고 가벼웠다.  우리는 두 그루의 오리나무 사이에 서 있었다. 거기 어떤 허연 물체가 누워 있었다. 자, 여기 이것이 나다. 라디가 말했다. 거기에는 내가 학교 시절부터 본 일이 있는 사람의 해골이 있었다. 그 곁에는 녹갈색의 금속 물체도...

볼프강 보르헤르트, <지붕 위의 대화>, 『이별 없는 세대』

 고통에 찬 밤에는, 우리의 술에 젖은 탁자와 꽃피는 잠자리와 고성방가로 넘쳐 울리는 길거리에는 또 전율과 공포와 절망과 벗어날 길 없는 막다른 골목이 있다. 그래도 우리는 웃는다. 힘에 닿는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 실존의 전부를 가지고. 우리 신앙이 없는 자들은, 속고 밟히고 어쩔 바를 모르는 체념한 자들은, 그리고 신과 ...

볼프강 보르헤르트, <밤꾀꼬리가 노래한다>, 『이별 없는 세대』

팀은 초소에 나갈 때 철모를 가지고 가려 하지 않았다. 나는 몹시 밤을 느껴보고 싶어라고 그는 말했다. 철모를 서야합니다라고 하사가 말했다. 언제든 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나는 바보가 돼요. 결국 나는 바보가 되거든. 이때 팀이 하사를 쳐다보았다. 팀은 그를 통해 세상 끝까지 꿰뚫어보았다. 그러고나서 팀은 한마디 일장 연설을 했다.&n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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