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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 「자정의 픽션」, 『핸드메이드 픽션』

193쪽 / 그리고 우리는 창밖에서 흘러들어와 천장에 희미한 무늬로 남은 가로등 빛을 나란히 바라보았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거기에 새로운 무늬가 덧새겨졌다. 밤이면 보게 되는 마지막 이미지, 예쁘지도 않고 별다를 것도 없는 가난한 흑백무늬였다. 남루한 이 하루의 끝엔 또하나의 남루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겠지. 게으르게 드러누워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겠...

박형서, 「신의 아이들」, 『핸드메이드 픽션』

94쪽 / 우리는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상징하는 기호체계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우리에게 산은 자연물로서의 산이 아니라 '산'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아우르는 몇 가지 정형화된 의미에 불과하다. 인간이 그처럼 기호를 만들어내는 건 대상을 획일화시킬 때 얻어지는 편리함 때문인데, 일단 기호가 만들어지고 나면 세상의 산들이 가진 고유한 색채와 질감과 냄새는 ...

박형서, 「정류장」, 『핸드메이드 픽션』

46쪽 / 새 집은 내가 싫어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거기엔 커다란 개가 있고, 못된 식모가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를 좋아하고 내게 친절히 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낯설었다. 당시 나는 열 살이었고, 낯선 것과 고통스러운 걸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밤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아버지가 눈을 ...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폭풍」

245쪽/ 삶은 계속됐지만 달라졌다. 더 물러졌고 더 지루해졌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이 없어진 듯하다. 그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까 늘 경계를 해야 한다. 그날 오후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누나가 자신의 삶 대부분을 그 구렁텅이의 가장자리에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 빠질 마음을 먹지는 않으나, 그것...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외출」

181쪽/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오래도록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계속 얘기를 했지만, 우리 둘 중 누구도 우리가 함께 보낸 지난 밤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나는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나중에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그 아이는 계속 딴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왠지 모르게 나는, 그 아이가 자기 입으로 ...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머킨」

200쪽/ 린은 나의 전 여자친구 로렌을 만난 적이 없지만, 린이 길 건너편으로 이사 오기 한 달 전만 해도 로렌은 아직 나와 살고 있었다. 우리는 5년을, 내 20대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기에, 그녀가 결국 집을 떠났을 때 나는 내 삶의 일부가 떠난 것 같은, 어쩐지 그 모든 시간을 잃어버린 것 같은, 그 모든 세월을 부질없이 보내버린 것 같은 기분이 ...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119쪽/ 돌이켜보면, 그날 밤 이후 내가 우울증에 빠졌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나는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던 내 삶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의사의 아내였고, 이제 큰 이변이 없는 한 나 역시 의사의 아내가 될 터였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내게는 무엇보다 큰 두려움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은 나를 겁먹게 하지 ㅇ낳...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17쪽/ 런던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해리엇은 「그런데?」하고 익살스럽게 말했다. 「내가 만약 임신하면 우리 저 집값은 어떻게 치르지?」 그랬다. 그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 진짜로 해리엇은 그 비오는 저녁 그 침실에서 임신을 했다. 자신들의 수입이 미미함을, 또한 자신들의 허약함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질적 ...

권여선, 「진짜 진짜 좋아해」,『비자나무 숲』

 밖으로 나오니 이미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청회색 구름들이 젖은 석고 덩어리처럼 뭉쳐져 지상으로 쏟아져 내릴 듯 낮게 드리워 있었다. 우주와영혼 같은 거창한 테마들을 생각하며 자취방에 돌아와 보니 역시 경은은 돌아와 있지 않았다. 방에도 없었고 욕실에도 없었다. 나는 흰 타일이 깔린 욕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바닥은 차디찼...

권여선, 「꽃잎 속 응달」,『비자나무 숲』

  그녀는 담배를 끄고 허리를 구부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제 딴에는 잘해보려고 온갖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돌아보면 온 청춘을 다 바쳐 망조가 드는 길로만 숨 가쁘게 치달려 온 셈이었다. 자신이 가려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와버렸음을 실감하는 이 순간, 절대적인 낯섦은 차라리 이곳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애초에 가려고 했던 곳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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