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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베토벤의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작곡가 자신보다는 베토...

금각사

9쪽 / 말더듬이가 첫마디를 소리내기 위해서 몹시 안달하는 동안은, 마치 내계의 농밀한 끈끈이로부터 몸을 떼어 내려고 버둥거리는 새와도 흡사하다. 겨우 몸을 떼어 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물론 외계의 현실은 내가 버둥거리는 동안, 휴식을 취하며 기다려 줄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다려 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니다. 내가 ...

연화전

 125쪽 / 나는 화선지의 결을 따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한 방울의 먹물을 보며 지난날 서황사에서 보았던 꽃차를 떠올렸다.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서서히 꽃잎을 피우던 마른 꽃처럼 빈 화선지에 생명이 깃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 쓰는 글이었지만 마치 봄바람을 맞은 꽃봉오리가 처음 꽃잎을 터뜨릴 때처럼 자연스...

희랍어 시간

14쪽 / 그 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

소립자(Les Particules Elementaires)

26쪽 / 같은 날 밤에 미셸은 샤르니 초등학교 시절에 찍은 사진 한 장을 다시 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사진 속의 아이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한 손에 교과서를 펼쳐 들고 있었다. 아이는 즐겁고 씩씩한 표정으로 카메라 쪽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오늘날의 그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감 넘치는 진지한 태도로 공부...

토성의 고리(Die Rings des Saturn)

27쪽 / 나는 동틀 무렵, 야간 간호사들이 교체될 때야 비로소 내가 어디 있는지 다시 깨달았다. 나의 몸을, 무감각한 발과 등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바깥 복도에서 병원의 하루가 시작됨을 알리는, 접시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여명이 높은 하늘을 물들일 즈음에는 내 방의 창문틀로 에워싸인 하늘조각 안에서 비행기구름이 마치 저절로 생겨난 듯...

세상의 마지막 밤(La porte des Enfers)

33쪽 / 그녀는 막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조금 전 정리한, 너무나 깨끗한 방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그녀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고,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녀의 하루는 방금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뛰어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도. 그녀는 거기,...

아직도 가야 할 길(The Road Less Traveled)

39쪽 /  "그 얘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시끄럽고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게 될까를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혹시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있으면 언젠가는 문제가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문제란 그대로 사라져 버리...

나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

14쪽 / 열살이 되던 그해에는 어디서든 재스민 향기가 났다. 처음에는 그게 세상의 냄새려니 했다. 그해 7월은 몹시 더웠고, 밤마다 비가 왔으며, 꽃이 만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욕조에서, 꿈속에서, 심지어는 손가락을 풀에 베었을 때 흘러나온 피에서도 재스민 향기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으로는 두려웠고, 다른 한편...

잃어버린 것들의 책(The Book Of Lost Things)

11쪽 / 데이빗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엄마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기도도 했다. 혹시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엄마가 벌을 받게 될까봐 항상 조심했다. 집 안을 돌아다닐 때에도 조용히 다녔고 장난감 병정들과 전쟁놀이를 할 때에도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루 일과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노력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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