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키 김 <통역사> 책 기록


40쪽 / 그러던 어느 날,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더니 룸메이트가 필요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천연 빨간 머리에다 오른쪽 주머니 위에 '빈센트'라고 수놓은 하늘빛 볼링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는 혼자 살 형편은 못 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과 아파트를 함께 쓸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녀의 첫인상이 좋은 데다가 자기는 아시아에서 살아보는 게 꿈이어서 아시아 출신 룸메이트와 함께 살며 소원을 비슷하게나마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반지가 주렁주렁한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케일럽이야. 스물한 살이고 철학자 겸 퍼포먼스 아티스트."
 그녀는 웃음을 참으며 손을 잡았다.
 "수지, 스물다섯 살이고 실업자."
 그녀는 케일럽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솔직하고 뜻밖에도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행운을 가져다주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세인트마크스플레이스의 아파트를 구한 것이 바로 그날 저녁이었으니 말이다. 실업자인 수지나 낮 동안 로어 이스트사이드의 채식 식당에서 일을 한다는 케일럽이나 바람직한 조건하고는 거리가 먼데 그렇게 쉽게 방을 구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잠시 후, 케일럽은 스카스데일에서 병원을 하시는 부모님이 보증을 서 주었노라고 털어놓았다. 두 분이 베푸신 은혜를 애스터플레이스 문방구 앞에서 만난 낯선 실업자와 함께 누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케일럽은 눈을 찡긋했다.
 "요즘 푹 빠진 아가씨라고 말했거든. 정말로 애인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아마 아파틀를 사 주셨을걸?"
 아파트는 이스트빌리지 특유의 엘리베이터 없는 철도식 아파트(방이 통로 역할까지 대신하는 아파트)답게 기다란 방 세 개가 연달아 붙어 있는 구조였다. 수지의 방에서 부엌으로 건너가려면 케일럽의 방을 거쳐야 했고, 부엌은 다시 세면대가 없는 욕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삿짐을 들여놓고 나서 부엌으로 뛰어나온 케일럽이 당황한 얼굴로 "칫솔 놓을 데가 없어!"라고 외친 뒤에야 욕실에 세면대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수지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욕조보다는 세면대가 없는 게 나았다. 뜨거운 목욕물이 없는 뉴욕의 겨울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케일럽은 식당에서 남은 두부 팬케이크, 우유를 넣지 않은 크림 브륄레를 종종 집으로 들고 왔다. 그 식당에서 먹을 만한 음식은 그 두 가지뿐이라고 했다. 나머지는 맛이 워낙 밍숭맹숭해서 그런 음식을 입 안에 넣는다는 것 자체가 미각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채식 식당에서 일하는 것은 다이어트를 위해 내린 현명한 선택이었다. 음식이 너무 맛있는 식당에서 일을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철학자 겸 퍼포먼스 아티스트라는 부분은 감이 오지 않았다. 케일럽은 책하고 담을 쌓은 인물이었고, 대중 앞에서 퍼포먼스를 펼치기에는 너무 냉소적인 성격이었다. 어느 날, 수지가 무시하거나 건방진 투로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건 농담이야. 예전에 우리 아빠가 동성애는 철학자 아니면 퍼포먼스 아티스트나 하는 짓이라고 말한 적이 있거든. 웨스트체스터에서 자란 아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말이 되느냐 이거지.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내가 고백했을 때 아빠는 눈물을 흘리셨지. 유대인 출신의 오십대 검안사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이라니!"


61쪽/ 대학교 때 수지는 몇 달마다 한 번씩 부모님이 사는 코네티컷의 대저택으로 다녀오는 젠이 부러웠다. 그곳에는 어렸을 때부터 쓰던 침실 속에 바비 인형과 너덜너덜한 큐어(1970년대 말에 결성된 영국의 펑크 록 그룹) 포스터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찍은 사진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수지가 보기에, 그토록 사랑스러운 미국식 과거를 담은 신전은 젠이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를 보여 주는 상징이자 보증서였다. 센트럴파크웨스트의 방 하나짜리 아파트, 팸스턴스의 여름 별장,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내년이면 레지던트를 마치는 또래의 남자 친구가 있는 유능한 편집자. 젠처럼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똑똑하고 야심만만한 젊은 여성이라면 뉴욕처럼 화려한 기회의 땅에서 이처럼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생활을 누릴 만했다.
 하지만 그것이 젠과 수지의 차이점은 아니었다. 두 친구는 나이도 같고 다니는 학교도 같고 브론테의 『빌레트』를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점도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애초부터 구조가 달랐다. 갓 이민 온 사람들이 그렇듯이 플러싱에서 브롱크스로, 브롱크스에서 다시 퀸스 안쪽으로 전전하며 보낸 수지의 어린 시절 때문은 아니었다. 시내 공립학교를 졸업한 수지의 학력이 교외의 사립학교를 졸업한 젠에 비해 초라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정도 부족함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무언가 달랐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근본적이고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었다. 

74쪽/ 그녀는 열차를 갈아타자마자 눈을 감고 여행이 계속 이어진다는 착각 속에 잠긴다. 그녀는 지금 엄마 아빠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그녀는 두 분이 얼마 전에 이사한 집, 바다와 맞닿은 파스텔 톤의 새 집을 그려 본다. 아빠의 새로운 취미 생활, 바닷가, 등대, 달빛, 뉴욕의 끝에 위치한 몬토크.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새로 산 지프를 몰고 기차역으로 수지를 마중 나온 엄마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한다. 운전대를 잡은 엄마는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선글라스와 하늘색 탱크톱 차림에 어깨 끈 사이로 선탠 자국이 보이고, 낚시를 떠난 아버지는 넙치를 잡아 어부에게 초밥용으로 살을 발라 달라고 할 것이다. 수지가 한국 식료품이 담긴 쇼핑백을 선물하면 부모님은 얼굴을 환히 빛내며 열어 본다. 몬토크는 플러싱이나 우드사이드, 잭슨 하이츠와 달라서 근처에 한국 식품점이 없다. 부모님은 김치, 건오징어, 명란젓을 보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두 분의 얼굴이 너무 눈이 부셔서 수지는 가늘게 실눈을 뜬다. 하지만 이때가 되면 수지는 항상 열아홉 살인 그녀의 나이와 힘든 대학교 생활을 떠올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러 부모님을 찾아왔는지 생각이 난다.
 엄마, 아빠.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요. 세상의 틀이 무섭고 그 틀을 모조리 깰까 무서워요. 나를 원하는 남자 아이들도 무섭고 나는 남자 아이가 아니라 남자를 원한다는 것도 무서워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릴까 두려워요.

76쪽 / "여기가 왜 시골이야? 디즈니랜드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걸!"
 어느 여름날, 자취를 감춘 에도 시대의 목판화가 있다는 골동품 가게를 찾아 해변을 샅샅이 뒤지던 데미안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데미안이 작업 중인 책의 자료를 찾으러 여행을 떠난 참이었다. 수지는 그 말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그만 흠집이나 단점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정직하고 타협을 거부하며 이상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고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는 데미안을 존경했다. 자신과는 달리 데미안은 사랑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던 날, 데미안은 그녀의 손에서부터 시작했다. 
 "예전부터 여자는 손으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너는, 네 손은 놀라워. 기다란 손가락에서 분노와 고집이 보이거든."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는 끊임없이 속삭였다. 불안한 사람처럼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른 데서 만났더라도 널 알아보았을 거야. 슬픈 너의 눈동자에는 비극의 낙인이 찍혀 있고 너의 콧날은 감수성이 풍부하지. 각도를 보면 알 수 있어. 이마가 나만큼이나 볼록 솟은 것을 보면 나처럼 야심만만하다는 뜻이지. 얼굴에 비해 너무 작은 입술은 아주 엉성하고 불안해 보여. 넌 단점투성이 미인이야."

159쪽 / "수지, 마이 달링. 노처녀가 되기에는 너무 눈부신 친구!"
문을 열었더니 케일럽이 웃고 있다. 몇 달 전, 첼시의 어느 화랑에 정규직으로 첫 출근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만나느 얼굴이다.
"여기도 일종이 백화점이야."
그는 일을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애스터플레이스 문방구 앞에서 수지와 처음 만났을 때는 숫기 없는 미술 대학원생이더니 이제 스물여섯인 케일럽은 많이 달라졌다. 자르지 않고 내버려둔 적갈색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까지 굽실거린다.
 "보티첼리 룩이란 거야."
 그는 윙크를 하며 말한다.
 "큐레이터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유럽의 쓰레기 바이어들도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끝내 준다'고 하고."
 그녀가 적포도주를 따르는 동안 케일럽은 지난번보다 뭔가 나아진 것이 있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아파트를 둘러본다.
 "수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지금 당장 인테리어 잡지 구독 신청해!"
 수지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노려본다. 케일럽은 그 표정을 보고 고모할머니도 없으면서 고모할머니 생각이 난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와 마주앉은 수지는 이 아파트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깨닫는다.

261쪽 / 젠은 수지와 달리 자부심과 확실한 소속감이 있다. 수지는 자부심이나 소속감을 터득한 적이 없고 터득한 것처럼 행세한 적도 없다. 젠은 주위에 속해 있지만 수지는 그렇지 못하다. 둘 사이에는 그런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수지가 그런 이유로 젠을 질투했다면 그녀는 결국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됐을 것이다. 가진 쪽보다는 가지지 못한 쪽에 비난을 퍼붓기가 훨씬 쉬우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질투했더라면 수지는 너무 외로워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젠은 그런 수지의 심정을 잘 알고 있다. 

283쪽 / "이 바닥에 있다 보면 예감이라는 게 생기거든요. 아가씨처럼 말끔한 분이 대낮에 레스터 형사님을 찾아오셨다면 심각한 사건이라는 뜻이죠. 아가씨가 동양계라는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동양계는 모범적인 시민이고 성실한 노동자라는 평가는 사실일 때가 많으니까요. 퀸스의 깡패들은 예외지만. 아가씨 같은 분은 가족과 관련된 사안이 아니면 이런 곳에 오실 일이 없죠. 그런데 미혼이신 것 같아서 부모님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사람을 달래는 재주가 있다. 그녀 나이 또래의 젊은 남자. 미혼. 예의 바르고 솔직한 사람. 그녀는 이런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항상 그녀의 영역 밖에 있다.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그녀가 겪는 것과는 다른 가정에서 자란 분위기를 풍긴다.

307쪽 / 수지는 유품을 정리하는 그레이스를 떠올릴 때마다 무지개색 담요 더미에 파묻힌 언니의 모습을 그리고는 했다. 두 자매는 엄마가 '밍크 담요'라고 부르는 두꺼운 겨울 담요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분홍색과 오렌지색으로 복잡한 꽃무늬가 그려진 인조 모피 담요였다. 따뜻하기는 했지만 수지가 보기에는 너무 무겁고 촌스러웠다. 수지와 그레이스는 대학교 기숙사로 떠날 때 엄마의 권유에도 밍크 담요를 챙기지 않았다. 엄마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가보로 여기는 물건을 두 딸이 거부한다는 데 섭섭해하는 것 같았다.
 "엄마, 이 담요는 밍크도 아니고 가보도 아니잖아!"
 이렇게 잘라 말하는 그레이스를 보며 수지는 마음이 안 좋았다.
 
318쪽 / 자리에 앉았더니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사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머니가 설렁탕, 곰탕, 꼬리곰탕, 도가니탕,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만든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냄새였다. 꼬리뼈, 무릎뼈, 연골, 내장, 각자 입맛에 따라 선택하기 나름이다. (...중략...) 한국 음식을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이 옛 생각이 난다. 마늘이나 파, 생강 냄새를 조금만 맡아도 물론 그녀의 가족은 그런 진수성찬을 먹어 본 적이 없다. 쌀밥과 반찬 몇 가지, 두부나 된장을 넣고 끓인 찌개가 고작이었다. 언제나 식탁 한쪽에는 김치가, 다른 쪽에는 멸치 볶음과 명란젓이 놓였다. 반찬은 거의 항상 가게에서 사다 먹었다. 잠잘 시간마저 부족한 엄마가 소꼬리를 고거나 김치를 담글 수는 없는 일이었다. 

322쪽/ "설렁탕? 제대로 골랐네요. 이 블록에서 건더기를 이렇게 많이 넣어 주는 식당은 없거든요. 게다가 여긴 김치를 버무릴 때 싱싱한 굴까지 넣는대요. 하지만 도가니탕은 길 건너편이 더 맛있어요. 무릎 뼈 사이에 생강을 넣어 달라고 하세요. 조금 비싸지만 겨울 내내 감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요즘 동양 젊은이들은 자신만만하고 생기발랄하다. 그녀와 수지의 나이 차는 겨우 열 살 정도이지만 둘 사이에는 엄청난 세대 차가 존재한다. 이 아이도 자신을 1.5세대라고 생각할까? 수지는 요사이 집 근처에서 뉴욕 대학교 학생들을 마주칠 때마다 눈이 부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힙합 문화에 젖은 아시아계 미국인, 굽 있는 운동화를 신고선 가닥가닥 머리를 땋은 남자 친구를 뽐내는 소녀들. 염소 숭며과 밴대나 차림으로 톰킨스스퀘어 공원을 스쿠터로 가로지르는 소년들. 이제는 동양 출신이라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아시아 출신과 고등학교 공부 벌레 체스팀 사이에 등호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제는 동양 출신이라는 사실이 심지어 멋있고 근사하고 쿨하기까지 하다.

335쪽/ 두 사람은 자매이니만큼 닮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쪽은 늘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가 입으면 시장에서 산 우중충한 옷도 아주 특별한 옷이 되었다. 마법으로 탈바꿈한 신데렐라를 보는 것 같았다. 수지는 감히 그녀의 유리 구두를 신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선을 긋는 쪽은 그레이스였다. 수지와 한 쌍이길 거부하는 쪽도 그레이스였다. 수지를 먼저 밀어내는 쪽도 그레이스였다. 때문에 수지는 그레이스가 대학교로 떠나면서 옷을 거의 챙기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젠 필요 없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너그러운 표현이 아니었다. 반대였다. 자매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말없는 선포였다. 자기 옷은 물론이고 같은 옷을 입고 다녔던 수지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가겠다는 뜻이었따. 수지는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다시는 안 오려고 그러는 거지?"
그레이스는 여행 가방을 활짝 열어 놓고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그녀는 공책 사이에 엄청난 두께의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을 끼워 놓다 잠시 멈추고 수지를 쳐다보았다. 싸늘한 냉기는 모두 사라지고 오히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한참 만에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가능한 한."
 당시 그레이스는 몇 달째 식구들과 이야기조차 하지 않던 참이었다. 계기는 그 사건이었다. 켈러 씨네 아들과 그 집 자가용의 뒷좌석에 있다 들킨 사건은 아니었다. 그 일은 훨씬 이전에 벌어졌고 그나마도 얼마 안 있어 이사를 하면서 금세 잊혀졌다. 그레이슨느 켈러 씨네 아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지만 수지가 보기에는 거짓말이었다. 그레이스가 어쩌면 폭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땜누에 그 사건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사항이 되었다. 그 때문에 아빠는 오히려 믿음이 생겼는지 이후로 다시는 그레이스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가족들과 대화를 끊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은 잭슨하이츠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수지는 무엇 때문에 아빠가 그렇게 폭발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밤, 아빠는 그레이스의 머리채를 잡고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 무렵 그레이스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왔다. 평소에 그레이스는 몇몇 학ㄱ 친구들이 못된 포카혼타스라고 부를 만큼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았지만 그날은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아빠가 가위를 들었을 때 날려 떨어지던, 검은색으로 출렁이던 머릿결이 아직도 수지의 기억에는 생생하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수지도 엄마도, 아빠를 말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벽에 기대고 서서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레이스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을 때 얼마나 증오가 서린 목소리였던지 수지는 덜컥 겁이 났다. 아빠가 인생을 포기할 참이냐고 고함을 지르자 그레이스는 대들었다.
 "아빠가 이미 포기하게 만들었잖아요."
 이상하게도 아빠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고 엄마는 고개를 돌렸다. 
 (...중략...) 
 겉으로 보기에 그레이스는 완벽한 딸이었다. 졸업생 대표로 졸업식장에서 고별사를 하는 딸.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학생이 되는 딸. 심지어는 아빠도 흠잡을 만한 구석이 거의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래서 아빠는 말이 필요 없는 곳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빛이 돌 만큼 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열일곱 살짜리의 머리카락을 빼앗았다.
 이후로 그레이스는 집 안에 틀어박혔다. 자신이 할 일을 다한 사람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때 수지는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레이스는 머리를 바짝 깎인 뒤로 한층 더 빛이 났다. 마치 비구니 소녀 같았다. 뜻밖의 변화였다. 그녀는 책을 읽던 도중에 썰렁한 뒷덜미를 손으로 쓰다듬곤 했다. 그녀는 한결 자유로워진 표정이었다. 이제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가 된 듯한 표정이엇다. 아빠가 도와준 셈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아빠를 속인 셈이었다.
 나중에 그레이스가 ESL 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지는 오래전 그날 밤에 들었던 그녀의 분노 어린 목소리를 떠올렸다. 영어가 제2의 언어가 된 학생들을 가르치는 ESL 선생님. 학생의 삼십 퍼센트 이상이 한국 출신인 포트리 고등학교. 아빠가 경멸할 만한 일이다 영어 공부. 한국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직업. 미국 땅을 새롭게 밟은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전파하는 임무. 그레이스는 부모님의 유지를 기억하되 그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이야말로 두 분을 마음 아프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수지뿐이다. 그레이스가 이상하다는 걸 아는 사람도 수지뿐이다. 그레이스가 종교를 택한 이유가 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걸 아는 사람도 수지뿐이다.
 그레이스가 뉴잉글랜드의 대학으로 건너가 종교에 심취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선택은 뜻밖일 뿐 아니라 악의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지독하다 싶을 만큼 열심히 교회에 매달렸다. 아빠가 한국적인 모든 것에 정면으로 대치하는 인물로 꼽았던 사기꾼, 한국의 5000년 역사를 무너뜨리려 들었던 원흉, 아시아와 그들의 불교, 유교 문화를 정복하려는 서양 음모의 대변자, 예수 그리스도. 그레이스는 예수를 택했고 수지는 나이 많은 백인 유부남, 사랑해서는 안 될 데미안을 선택했다. 하지만 수지는 그레이스라면 좀 더 현명할 줄 알았다. 그레이스라면 부모님 그늘을 벗어날 줄 알았다.

434쪽 / "미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1972년에 왔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십니까?"
"거의 못합니다."
"최종 학력은 어떻게 되십니까?"
"이의 있습니다!"
이민국 측 변호사가 발끈하며 나선다.
"피고 측 변호인은 지금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피고의 이력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인정합니다."
윌리엄스 판사가 이렇게 판정을 내린다. 요점만 말하라는 뜻이다. 이미 가망 없는 사건이니만큼 이 자리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뜻밖에도 최정순은 아랑곳없이 대답한다.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이화여재다학교에서 음악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놀랄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건너온 많은 사람들은 학력이 대졸이다. 한국은 문맹률이 영 퍼센트에 가까운 나라다. 그들은 교육 수준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세탁소 주인이 건축가 출신이거나 네일숍의 페디큐어 담당이 약사 출신이거나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들은 유교 전통에 따라 학식을 자존심의 기본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 전문직과 상인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 노동자로 전락했다는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한다. 야채 가게 카운터 일을 이십 년 넘게 한 여자가 음악학도였다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잠깐 동안 침묵이 맴돈다. 지금 이 여자의 모습에서 음대 석사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로 아물허게나 묶은 회색 머리. 메이블린이나 랑콤이나 화사한 빛을 더해줄 화장품이 당장에 필요한 누르스름한 얼굴. 굳은살 투성이의 튼 손과 부스러진 손톱. 여자는 자신의 대답에 놀란 듯이 소매 속으로 슬그러미 손을 감춘다.
"최정순 씨, 미국 내에서 신분이 어떻게 되십니까?"
"영구 거주자입니다."
"어떤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오셨습니까?"
"학생 비자를 받고 왔습니다."
"입학 허가를 받은 학교가 있습니까?"
"줄리어드."
"그리고 그곳에서 공부를 하셨습니까?"
"아니오."
"못하신 이유가 뭡니까?"
"부모님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학비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국 야채 가게에 카운터를 보는 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돈을 모아서 공부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462쪽 / "대학교 때 우리 과에서 빈센트에 푹 빠진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다들 나더러 고리타분하다고 놀리더라고. 반 고흐를 좋아하거나 초급 회화 수업에서 그를 연구하거나 첫 번째 숙제로 「별이 빛나는 밤」을 흉내내서 그릴 수는 있어도 푹 빠질 수는 없다는 거야. 모두들 몬드리안, 보이스, 뒤샹으로 옮겨가도 나는 지조를 지켰지. 지금도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가슴이 뛰어. 「사이프러스」를 보면 눈물이 나고. 예전엔 매일 밤마다 잠이 들기 전까지 그가 남긴 편지를 읽었는데."
<수지는 두 사람이 함께 살던 시절, 케일럽이 항상 입고 다녔던 하늘 빛 볼링 재킷을 떠올린다. 재킷의 오른쪽 주머니에는 '빈센트'라는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그런데 수지는 예전 남자 친구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한 사람을 알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하지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비밀을 감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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