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트 헤르만, <루스(여자친구들)>, 『단지 유령일 뿐』 단편소설 기록


 13쪽/ 내가 루스를 방문했을 때—그녀의 새로운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그녀를 방문하려 했다.—그녀는 역으로 마중 나왔고, 그녀가 나를 보기 전에 내가 먼저 그녀를 봤다. 그녀는 플랫폼을 따라 걸으며 나를 찾고 있었다. 길고 파란 원피스에, 머리는 올렸고, 얼굴은 빛났다. 몸 전체의 긴장감, 걸음걸이, 머리의 각도와 무언가를 찾는 듯한 눈빛은 어떤 기대감에 차 있었는데, 나를 기다리는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내가 그녀 앞에 불쑥 다가섰다. 그녀는 놀라서 나를 덥석 안고 키스를 하며 "아이, 계집애."하고 말했다. 그녀가 뿌린 새 향수는 자작나무와 레몬 향기를 풍겼다. 나를 부둥켜안고 있던 그녀의 손을 거두면서 나는 그녀를 꼭 안았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웃음이 낯익었다.

 
16쪽/ "나는 전리품이 되고 싶지 않아, 이해하겠니?"하고 나와 라울, 그리고 나머지 세상이 부끄러울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솔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루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넌 전리품이 아니야. 아무도 너를 배반하지 않을 거고 사냥감으로 삼지 않아. 내가 알아." 내 말은 진심이었고, 루스는 잠깐 위로를 받은 듯 자신 있어 보였다. 그녀는 내 손을 잡더니 물었다. "근데 넌? 잘 지내니?" 항상 그렇듯 나는 대답을 회피했고, 그녀도 항상 그렇듯 답을 피하게끔 내버려 두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오후의 햇살 아래 졸음에 겨운 듯 앉아 있었다. 저녁 7시쯤 루스는 극장에 가야 했고, 나는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19쪽/ 언젠가 나는 루스의 재능과 그녀의 직업, 박수갈채,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부러워한 적이 있었는데, 이 부러움은 내가 연극배우로는 적당치 않고 불가능하다는 깨달음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텅 빈 앞 좌석에 몸을 숙이고 앉아 루스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녀가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일을 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일어서서 극장 구내식당으로 갔다.


22쪽/ 나는 그를 바라보며 그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믿어 버렸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를 다시 탁자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용히 가쁘게 숨을 쉬었고, 갑자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루스가 들어왔다.
 그녀는 들어서면서 바로 라울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흐트러짐 없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지은 얼굴 표정은 내게 새로웠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34쪽/ 이상하게도, "내가 너였으면 좋겠어."라고 말한 사람은 루스다. 그 반대가 아닌, 내가 아닌.


40쪽/ 루스와 나에 대해 더 얘기할 무엇이 있기는 있을까? 우리는 딱 한 번 밤에 어느 카페에서 키스한 적이 있다. 사실 그건 루스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사람을 쫓아 버리기 위해서였다. 루스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열렬하고 부드럽게 내 입에다 입을 맞추었는데 껌과 포도주, 담배 냄새가 났었다. 그녀의 혀는 이상하리만큼 달콤했고 키스를 잘했다. '루스와 키스하면 이런 거구나.'하고 놀랐던 게 생각났다. 분명히 나중에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 루스를 흠모하던 사람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가 더 조금 더 어렸을 때 루스는 더 잘 감격했고 거침이 없었으며, 술을 많이 마셨고 바 스탠드 위에서나 탁자 위에서 춤추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걸 좋아했고 늘 보채기도 했다. "루스, 탁자 위에서 춤춰 봐, 응?"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컵을 한쪽으로 밀치고 굽 높은 신으로 탁자 위의 재떨이를 차 버리고는 도발적으로 춤을 췄다. 훨씬 뒤에는 춤추기 싫어했고 가끔은 화를 내면서 "난 네 인생을 대신 살아 주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도 했다. 우리는 옷도 똑같이 입고 다녔다. 긴치마, 모피 깃이 달린 외투, 진주 목걸이. 우리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말했다. "너희들은 러브버드 같아, 작고 노란 카나리아. 너희들은 항상 똑같이 앉고 머리도 항상 같은 리듬으로 움직여." 우리는 그 비유를 좋아했다. 가끔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답을 했다. 하지만 똑같은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었고, 어떤 사실에 대해 함께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불확실하던 미래가 점점 더 분명해지고 거기에 우리가 계획을 세워야 했을 때 미래는 공동의 것이었다. 루스와 나. "우린 헤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걸 루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자주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가 늙으면 어떤 모습일까 머리에 그려 보았지만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웃을 때 그녀는 제일 예쁘다. 그러나 그녀가 말없이 앉아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눈썹은 너무 가늘고, 은빛 초승달처럼 가지런하고, 손은 아주 작다. 내가 뭔가 얘기할 때 그녀는 내 말을 확실히 듣고 있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같이 찍은 사진도 한 장 없다. 나는 루스를 알고 있었는가?



유디트 헤르만, <루스(여자친구들)>, 『단지 유령일 뿐』

덧글

  • 2016/02/23 19:0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3/11 21:3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03/29 10:3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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