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타 뮐러, <저지대> 책 기록


33쪽/ 무릎의 살갗이 벗겨져 쿡쿡 쑤시고 아렸다. 너무 아파서 내가 벌써 죽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무서웠다. 하지만 아직 아픈 걸 보니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벌어진 무릎 틈으로 죽음이 들어올까봐 겁이 났고, 그래서 얼른 손바닥으로 상처를 덮었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었기에 증오를 느꼈다.


35쪽/ 밤마다 두려움이 잠을 쫓아내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어둠 속에서 가구를 더듬었다. 그를 찾아내진 못해도, 그가 방 안에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침이면, 지난 저녁 전등갓에 부딪히던 지저분한 갈색 밤나방들만 천장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방들을 손으로 집어들었다. 손가락에 갈색 가루가 묻어났다. 나방 날개를 만지고 나면 내 손이 닿은 날개 부분이 투명해졌다. 내가 놓아주어도 나방들은 내 무릎 아래서 한동안 파닥거릴 뿐, 더 높이 날지는 못했다. 나는 납아들을 신발로 밟아 구해주려 했다. 보드라운 배가 터지면서 뽀얀 우윳빛 액체가 바닥에 튀었다. 그러자 신발에서 구역질이 타고 기어올라와서는 그 끈으로 내 목을 졸랐다. 그 손은 뚜껑 달린 침대에 누운 노인들의 손처럼 앙상하고 차가웠다. 사람들은 그 침대 앞에 말없이 앉아 기도한다.
 두건을 꽉 묶은 늙은 여인들의 턱이 떨렸다. 나는 눈물 젖은 듬성듬성한 속눈섭에 붙은 눈곱을 보았고,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 침대가 관이고 그 안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죽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내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었는데도 무슨 뜻ㅇ니지 알아들었다. 그 말이 며칠 동안이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수프 속의 닭고기 조각을 볼 때마다 시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할머니는 두 번 다시 나를 죽은 사람에게 데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평일 오후 마을에 음악이 울려 퍼지면, 나는 또 누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
 죽은은 언제나 벽 뒤에 있는데도 어째서 눈ㅇ 보이지 않는지, 또는 평생을 죽음 곁에서 사는데도 어째서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눈에 보이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101쪽/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서 미끄러지듯 마루 위를 움직인다.
 나는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다. 어머니가 점점 더 어머니 자신이 되고 점점 더 동작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어머니 앞의 마룻바닥이 반들반들 빛난다.
 어머니의 눈이 요리조리 살핀다. 눈 속의 검은 반점 같은 동공이 빙글빙글 돈다. 온종일 동작으로 지내지 않을 땐, 어머니의 눈은 잔잔하고 아름답다.
 어머니의 시선이 양동이와 마룻바닥 사이를 오간다.
 어느 날 어머니는 마룻바닥에 쌓인 모래 꿈을 꾸었다. 어머니는 모래 더미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길을 말끔하게 닦는다. 모래가 손톱 밑을 파고든다. 모래가 말므녀서 다시 수북이 쌓인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그런 꿈을 꾸었다. 아침에 꿈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지만, 꿈속의 영상들은 어머니의 살갗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어머니가 허구한 날 열심히 물로 닦아재는 바람에 온 집 안의 마룻바닥이 석어들어갔다. 나무를 갉아 먹는 벌레가 습기를 피해 문으로, 식탁으로, 문손잡이로 숨어들었다. 가족사진을 걸어둔 액자도 벌레가 홈을 파먹어 가루가 묻어났다. 어머니는 새로 산 비로 가루를 쓸어냈다. 


114쪽/ 나는 죽음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이대로 고꾸라지면 죽겠지 싶었다. 풀숲에 머리를 박으면 끝이겠지.
 나는 돌멩이가 없는 풀밭을 찾았다. 얼굴에 상처가 나지 않게 드러눕고 싶었다. 그늘에서 몸을 차갑게 식혀 아름답게 죽고 싶었다. 
 내가 죽으면 틀림없이 예쁜 새 옷을 입혀줄 것이다.
 한낮이었고,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왜 갑자기 죽었는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눈물을 철철 흘릴 것이다. 그리고 온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찾아오지 않았다.
 여름이 내게 무성한 풀밭의 진한 꽃향기 세례를 퍼부었다. 야생 아르메리아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나는 강을 따라 걸으며 팔에 물을 낑넞었다. 살갗에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나는 아름다운 늪지대였다.
 무성한 풀숲에 누워 나를 땅속으로 졸졸 흘려보냈다. 나는 커다란 버드나무들이 강을 건너와 내 안에 가지를 치고 이파리를 흩뿌리길 기다렸다. 버드나무들이 이렇게 말하길 기다렸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늪이야. 우리 모두 너를 찾아왔어. 크고 늘씬한 물새들도 데려왔어. 물새들이 네 안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지저귈 거야. 그래도 너는 울면 안 돼. 늪은 용감해야 하거든. 네가 우리랑 같이 지내기로 한 이상 모든 걸 참아내야 해.
 커다란 날개를 가진 물새들이 내 안에서 살 수 있게, 내 안에서 날아다닐 수 있게 나는 한껏 넓어지고 싶었다. 그리고 제일 예쁜 동의나물도 가지고 싶었다. 동의나물은 무겁고 반짝반짝 빛이 난다.



—헤르타 뮐러, <저지대>,  김인순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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