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먼로, <열정>, 『런어웨이』 단편소설 기록


/245쪽 
 이번 탐험에 나서면서 그레이스가 정말로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최악은 그저 자신이 찾고 있던 것으로 착각한 것을 찾고 마는 것일지도 몰랐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지붕, 가려진 창문, 집 앞의 호수, 집 뒤에 있던 단풍나무와 삼나무와 길레아드 발삼나무 숲. 완벽한 보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과거, 모두 그레이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지붕창이 생기고 지나치게 새파란 펭니트가 칠해진 지금의 트래버스네 집처럼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뜬금없어진, 아주 초라해진 것을 찾게 된다면 차라리 마음이 덜 아플지도 모르겠다.
 만약 찾던 것이 아예 사라져버리기라도 했다면? 우리는 투덜거린다. 함께 온 사람이라도 옆에 있으면 들으라는 듯, 상실감에 울부짖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고, 예전에 느꼈던 당혹감이나 해묵은 의무감이 일소되지는 않을까? 


/250쪽  
그레이스는 그날 밤 자신이 입었던 옷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감색 발레리나 스커트에 아일렛 레이스를 통해 가슴 봉우리가 엿보이는 흰색 블라우스 차림에 폭 넓은 장밋빛 고무벨트를 매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몸을 단장한 방식과 상대에게 인식되고 싶은 모습 사이에는 분명 격차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스타일로도 그녀에게는 얌전하다거나 당돌하다거나 세련된 구석은 전혀 없었다. 식사 시중을 들 때는 커다란 망사 속에 가둬야 할 정도로 제멋대로인 길고 곱슬곱슬한 머리에,싸구려 은색 팔찌를 차서 집시 같은 분위기를 냈지만 사실 약간 조잡했다.


272쪽/ "보이스카우트 정신이죠. 늘 준비하라."
손놀림에서도 눈빛에서도 술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아이들한테 말할 때 흉내 내던 장난꾸러기 외삼촌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레이스를 대할 때 흉내 내려던 전문 용어를 능수능란하게 읊어 환자를 안심시키는 의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넓고 창백한 이마에 잿빛이 감도는 뽀글뽀글한 흑발을 볏처럼 세운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고, 눈동자는 연회색이었으며, 극심한 조바심 때문인지 식욕 땜누인지 고통 때문인지 길고 얇은 입술을 비죽거리고 있었다.
 

/275쪽 
 훗날 그녀에게 그녀가 지금 택한 길, 그녀의 인생에 일어난 지금과 같은 변화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한다면, 그녀는 문 하나가 뒤에서 꽝하고 닫힌 것 같았다고 말했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꽝 소리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묵인이 파문을 일으키며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고, 남은 사람들의 권리는 간단하게 묵살되었다.
 곱씹어볼 때마다 살짝 달라진 부분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레이스는 그날을 또렷하고 자세하게 기억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심지어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던 부분에서조차 그레이스의 기억은 틀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285쪽/ 
그레이스는 집이 드리운 그늘 아래,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 집의 문은 열려 있었고, 방충망 문만 닫혀 있었다. 방충망에는 군데군데 때운 흔적이 있어서 예전 철사와 새 철사가 뒤섞여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보러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개 한 마리조차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제 자동차 시동마저 꺼진 주변에는 기이한 적막감이 넘쳐흘렀다. 그렇게 뜨거운 날 오후라면 풀밭에도, 노간주나무 풀숲에도 온갖 벌레들이 윙윙거리고 왕왕거리고 찍찍거릴 만도 한데 아무것도 없으니 기이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없더라도 벌레들이 내는 소음만은 땅 위에서 자라고 있는 온갖 것들에서 흘러나와, 저 멀리 지평선 너머까지 퍼지게 마련이었다. 어쩌면 철이 지나서, 남쪽으로 날아가면서 꽥꽥거리는 거위의 울음소리를 듣기에도 늦어버려서 그런 걸까?
 마치 그들이 세상 꼭대기에, 아니 그중 한 군데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들판은 사방에서 낮아지고 있었고 나무들도 더 낮은 지대에서 자라는 나무들이라서 위숩분만 살짝 보였기 때문이다.


291쪽/ 그레이스는 촉감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입술, 혀, 피부, 몸, 뼈 위에 뼈가 부딪히는 느낌. 격정. 열정. 하지만 그것은 그레이스와 닐과는 인연이 먼 것들이었다. 그녀가 그를 알아가게 된 경위, 그녀가 그의 냄녀을ㅇ 러마나 깊이 들여다보았는지를 생각하면 그것은 애들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녀가 본 것은 고정불변 상태였다. 그녀는 마치 끝없이 펼쳐진 잔잔하고 시커먼 물가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차갑고 고요한 물, 아주 시커멓고 차갑고 고요한 물을 내다보면서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 물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앨리스 먼로, <열정>, 『런어웨이』, 황금진 옮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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