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먼로, <침묵> 단편소설 기록


208쪽/ 어느덧 퍼넬러피의 사진은 모조리 침실로 추방당했다. 웨일 베이를 떠나기 전 그린 연필 그림과 크레용 그림 다발, 갖가지 책, 여름 동안 맥도날드에서 일해서 난생처음 번 돈으로 줄리엣을 위해 샀던 선물인 프렌치 프레스가 달린 유럽식 1인용 커피메이커도 함께 쫓겨났다. 냉장고에 붙이는 소평 플라스틱 선풍기같이 아파트를 장식하라고 사다 준 충동적인 선물, 태엽식 장난감 자동차, 욕실 창문에 거는 비즈 커튼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침실 문은 굳게 닫혔고 이윽고 마음의 동요 없이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210쪽/ 반면 에릭은 자신들의 문제가 흐지부지되다가 아예 묻혀버리길 더없이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부부간에 예의를 지키다 보면 서로에게 호감을 되찾을 것이며, 사랑을 재발견할 때까지는 사랑 비슷한 것만 있으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에릭의 사고방식이었다. 만약에 사랑 비슷한 것도 없다면, 그래도 견뎌야 했다. 에릭은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에릭한테는 그게 정말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에 줄리엣은 낙담했다.


222쪽/ 지금의 그녀를 에릭이 봐야 되는 건데.
줄리엣은 늘 이런 식으로 에릭을 생각했다. 에릭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단 한 순간도 그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에릭이 여전히 그녀의 존재를 그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도 된다는 듯,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그를 찾았다. 그가 여전히 자신을 빛나는 존재로 봐줄 사람이라도 된다는 듯, 여전히 논쟁거리와 정보와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된다는 듯……. 이것은 오래된 습관이기도 하고, 워낙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그가 죽었다는 사실도 어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마지막 싸움도 결판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왜 나를 배신했느냐고 에릭을 추궁하고 싶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자신이 조금은 눈부실 때 배신은 더더욱 납득이 안 됐다.
 폭풍우, 시신 수습, 해변에서의 화장, 이 모든 것이 줄리엣에게는 에릭과 자신하고는 무관한데도 억지로 지켜보고 실재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가장행렬 같았다.


223쪽/ 웨일 베이에서의 삶이 일단락되기 전, 2월의 어느 날엔가 줄리엣은 오후 업무를 마치고 학내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비가 그친 후 서쪽으로 길게 펼쳐진 맑은 하늘은 조지아 해협 너머로 해가 완전히 떨어지면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처럼 낮이 길어졌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계절이 어김없이 변하는 모습은 그녀에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에릭이 죽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벤쿠버에서 살고 있는 동안 에릭이 어딘가에서 그녀와 재결합할 날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에릭과 함께한다는 것이 마치 결정을 기다리는 하나의 선택 사항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벤쿠버에 정착한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에릭의 그림자를 느끼며 살아갔다. 에릭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깨우치지 못한 채. 에릭의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세상에서 그와 함께했던 기억은 구석에 처박혀 버렸다.
 이런 것이 애도로구나. 심네트 한 포대가 쏟아져 들어와 순식간에 몸이 굳어버린 느낌이다.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다. 버스에 오르고, 버스에서 내리고, 집까지(대체 왜 여기에 살고 있는 거지?) 반 블록을 걸어가는 일이 마치 절벽을 오르는 것만 같다. 퍼넬러피한테 이런 기분을 들켜선 안 된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지만 줄리엣은 손가락을 풀고 포크와 나이프조차 내려놓을 수 없었다. 퍼넬러피가 식탁을 빙 돌아와 줄리엣의 손을 비집어 열어주었다.
 퍼넬러피가 물었다. "아빠 때문이지, 그렇지?"
 그 후 줄리엣은 크리스타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 몇몇에게 퍼넬러피의 그 말은 세상에서 가장 큰 위안을 준 말이자 가장 애정 어린 말처럼 들렸으며, 이제껏 그 누구도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앨리스 먼로, <침묵>, 『런어웨이』 , 황금진 옮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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