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먼로, <런어웨이> 단편소설 기록

12쪽/ 이번 여름은 비가 지겹게 내렸다. 아침에 가장 먼저 들리는 소리가 이동식 주택의 지붕 위를 시끄럽게 때리는 빗소리였을 정도로. 길은 진창이 되었고 길게 자란 풀잎은 물을 머금고 있다가 폭우가 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먹구름이 끼지도 않은 때에 시도 때도 없이 물벼락을 내렸다.


31쪽/ 식물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여학생들은 더러 있었다. 그런 특별한 여학생이 지니고 있는 영리함과 헌신과 어설픈 자의식이나 자연계에 대한 진정한 열정을 보면 실비아는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그런 여학생들은 마치 팬처럼 실비아를 추종하면서 상상 이상의 친밀감을 기대했지만 대개의 경우 얼마 안 가 실비아에게 짜증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칼라는 그런 아이들과 달랐다. 실비아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에 칼라와 닮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고등학교 시절에 알고 지냈던 여자아이들일 것이다. 그 아이들은 영리했지만 영악하지 않았고, 착한 운동선수였지만 승부에 목을 매지 않았고, 발랄했지만 난폭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행복한 아이들이었다.


50쪽/ 사실 칼라의 입장에 처한 사람이라면 탈출만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는 했다. 딱하게 여길 수밖에 없으면서도 아이러니하고 정직하게 제이미슨 부인에게 자신의 인생사를 털어놓고 보니 생소한 자신감도 심지어 어른스러운 유머 감각마저도 구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서 제이미스 부인 그러니까 실비아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그 누구보다 예민하고 엄격할 것 같은 제이미슨 부인을 실망시킬지 모른다는 예감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걱정은 접기로 했다.
 앞으로 꽤 오랫동안 실비아는 곁에 없을 테니까.
 태양은 예전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앉았을 때 햇빛은 와인 잔을 반짝반짝 빛내주었다. 이른 아침 이후로는 비도 쏟아지지 않았다. 바람도 적당히 불어 길가의 풀과 꽃을 피운 잡초들을 푹 젖어 있던 수풀 속에서 일으켜 세워주었다. 비구름이 아닌 여름날의 구름이 하늘을 휙휙 가로질렀다. 시골은 몸부림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부신 7월로 변신 중이었다. 달리는 버스에서는 얼마 안 된 과거의 흔적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들판에 있던 커다란 물웅덩이가 사라지면서 비에 휩쓸린 씨앗들의 행방이 드러났고, 장대같이 비쩍 말라 딱했던 옥수숫대나 납작 엎드렸던 곡식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불현듯 클라크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어떤 별난 이유 때문에 그들이 그 눅눅하고 따분한 촌구석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에서라면 성공할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아니 어쩌면 지금 사는 곳에서도 아직 성공을 못한 것뿐일까?
 그러다가 클라크에게는 앞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사실 또한 떠올랐다. 영영 그에게 말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클라크가 어떻게 되건 말건 상관하지 않을 것이고 그건 그레이스나 마이크나 주니퍼나 블랙베리나 리지 보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늘이 도와 플로러가 돌아온다고 해도 칼라는 그 소식을 듣지 못할 것이다.
 지금처럼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떠나는 것이 칼라에게는 두번째였다. 첫 번째는 딱 옛날 비틀스 노래 같았다. 식탁 위에 쪽지를 남기고 새벽 5시에 집을 슬그머니 빠져나와 길 아래 교회 주차장에서 클라크를 만났다.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떠나면서 칼라는 실제 그 노래 가사를 흥얼거렸더랬다. 그녀가 집을 떠나가네, 안녕, 안녕. 뜨는 해를 뒤로하고 팔뚝에 난 털조차 늠름해 보였던 클라크가 운전하던 모습을 보던 일이며, 트럭 안에서 풍기는 기름과 금속 냄새, 각종 도구와 마구간 냄새를 들이마시던 것까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쌀쌀한 가을 아침 바람이 트럭의 녹슨 틈으로 새어 들어왔었다. 트럭은 칼라네 가족은 타본 적도 없고, 그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좀처럼 볼 수조차 없는 종류의 차였다.


"넌 네가 무엇을 버리려고 하는 건지 모를 거야."
 어느 날 어머니한테 받은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 일찍 사랑의 도피를 했던 그 떨리는 순간에 칼라는 비록 어디로 가게 될지는 잘 몰랐어도 자신이 무엇을 버리고 온 건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칼라는 부모도, 집도, 뒷마당도, 가족 앨범도, 휴가도, 쿠잔아트(주방용 소형 가전 브랜드)도, 파우더룸도,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높았던 붙박이 옷장도, 지하에 설치해놓은 잔디용 살수 장치도 못 견디게 싫었다. 길지 않은 쪽지에 칼라는 진짜라는 단어를 썼다.
 늘 진짜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엄마 아빠는 이해 못 하시겠지만요.



앨리스 먼로, <런어웨이>, 황금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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