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모리아크, <사랑의 사막> 책 기록


31쪽/  한집에서 밀착해서 살다 보면 식구들은 각자가 상대방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그릇된 믿음에 빠지게 된다. 자신은 진심을 털어놓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비밀은 파헤치고 싶은 모순된 욕구를 가지게 된다. 할머니는 며느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그 애는 절대로 나한테 아무 이야기도 안 해. 그래도 나는 그 애 속을 훤히 알지." 타인의 비밀은 투명하게 드러나기 바라면서도, 자신은 타인에게 불가해한 존재로 남기를 소망하는 오만! 이런 오류의 경향성에 따라, 레몽도 어머니가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식당에 나타났는지 안다고 자신했다.
 

37쪽/ 초벽을 바른 학교 안마당에 갇혀 온갖 박해를 받고 있는 이 연금의 시간 동안, 그를 지탱한 것은 단 하나의 목표였다. 어딘가로 떠나겠다는 욕망! 어느 새벽 여름, 쿠레주 저택을 떠나 저 멀리 스페인으로 이어진 대로를 따라 도망쳐 버리겠다는 욕망! 나폴레옹 황제 시대, 대포와 군대 행렬이 지났던 그 영광의 길처럼 거대한 포석이 깔린 그 길은 거창할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수록 감미로운 취기가 그를 휩싸고, 학교와 음울한 가족에게서 멀리 달아날 수 있겠지! (...중략...) 때때로 그는 책을 덮고 열렬한 공상에 잠겼다. 길가 소나무 위에서는 매미가 울 것이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마을, 시원하고 어두운 여인숙에 기진맥진해서 누워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닯치이 수탉을 깨우고, 차가운 새벽녘에 빵을 씹으며 다시 길을 떠나겠지……. 때로는 물레방앗간에서 잠이 들지도 몰라……. 지푸라기가 별을 가리고, 이슬에 젖어 축축해진 채 새벽에 깨겠지…….
 그런데 왜 레몽은 도망치지 않았을까? 선생님들과 부모님이 입을 모아, 무슨 일이든 해낼 능력이 있다고 칭찬했던 이 청년은 왜 떠나지 않았을까? 부지불식간에 적들이 강해져 레몽을 압도했던 것이다.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은, 레몽이 스스로를 비참한 존재로 정의해 버린 데 있었다. 열일곱의 아직 어린 이 청년은, 타인들이 자기에게 투사한 이미지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레몽 쿠레주는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얼굴선을 알아뵞 못한 채, 자신을 추한 괴물로 여기며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세상을 향한 레몽의 적대감도 커져 갔다. 이 적대감과 수치심을 세상을 향한 복수심을 키웠고, 주위 사람들이 경악할 만한 공격적인 행위를 저지르고도, 늘 성에 차지 않았다. 사실 더 깊이 상처 입고 고통 받는 쪽은 늘 그 자신이었으니까.
 이런 이유로 인해,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싶은 욕구가, 어딘가로 멀리 떠나고 싶은 욕망을 압도해 버렸다. 멀리 도망간다 한들 미지의 사람ㄷㄹ이 그를 혐오할 것이다. 그건 절대로 피하고 볼 일이다! 수도회 수사들은 레몽과 손이 닿는 것조차 꺼려했지만, 방탕의 소문과는 상관없이 이 불상한 청년은, 수사들만큼이나 여자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다. 아무리 못생기고 지저분한 하녀라 해도 자기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육체가 수치스러웠다. 방탕하고 천박한 행동을 과시했던 것도, 사랑받지 못할 바에야 선수를 쳐서 그 비참함을 아예 자신이 자초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사춘기 소년의 불쌍한 허세였던 것이다. 선생들도 부모도 혼돈기를 통과하는 소년이 가지는 가엾음 교만, 절망에 쫓긴 굴욕을 알지 못했다. 


45쪽/ 매일 저녁 보르도 교외의 작은 마을들을 지나는 하굣길 여행을, 레몽은 여전히 좋아했다. 학교의 문턱을 넘자마자 감미로운 저녁 공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날씨에 따라 안개 냄새가 나기도 하고 차갑고 건조한 미풍이 불기도 하는 이 작은 길들은,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비밀을 품고 있었다. 끝없이 다양하게 펼쳐지던 그때의 하늘. 어둡거나 맑게 갠 하늘, 별이 총총 박힌 하늘, 구름 뒤에 달이 숨어 있는 흐린 하늘이 저마다 친숙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걷다 보면 곧 입시세관이 있는 전철역이었다. 전차는 늘, 지치고 꾀죄죄하지만 온화한 얼굴을 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루 치 노동을 마친 사람들의 무게를 실은, 이 거대하고 노란 직사각형의 물체는 천천히 출발해 전원 풍경 속으로 가라앉으며 달렸다. 타이타닉호보다 더 환하게 불을 밝힌 채, 슬픈 풍경 사이를 달려 겨울밤의 한가운데로 침몰해 갔다.


73쪽/ 그러나 박사가 용서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악덕이 있었다.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자기 악덕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기술 말이다. 그것은 정말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죄이자 결함이다. 이 죄를 범할 때 인간은, 마치 다이아몬드에 눈이 부시듯 그렇게 자기 악취에 도취된다. 예전의 마리아는 이런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았다. 관계의 초기에 박사를 유혹했던 것도 그녀의 정직에 대한 열정, 즉 어떤 것도 미화하지 않고 자기를 명확하게 인식하고자 하는 열정이었다. 


137쪽/ 그래, 맞다. 마리아가 소년을 집으로 불러들인 건 오직, 오후 여섯 시 전차에서 맛보았떤 그 달콤함 때문이다. 레몽의 존재가 주는 위안과 평화, 슬프지만 깊이 있는 관조……. 이 방 안이라면 전차에서보다 더 가까이 그것을 느끼고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오로지 그것 말고는 없나? 정말 그런가? 누군가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와 함께 가능한 한 오래 머물고 싶어져. 그리고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전망이 불투명해지면 불안과 욕구불만에 빠지게 되지.


149쪽/ 산 자를 전율하게 만드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다. 죽은 자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심연의 언저리에서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이다. 돌아올 수 없음을 알면서 헛되게도. 우리는 그가 말없이 동의하고 있다고 여긴다. 죽은 자의 침묵과 부재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151쪽/ 사랑의 게임에서, 두 공모자 중 한 사람이 도망쳐 버리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그가 현존할 때 있던 장애물이 다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레몽 쿠레주가 눈앞에 있을 때 마리아는 마음을 억누르기가 쉬웠다. 무엇보다, 그가 아직 소년에 불과함이 눈으로 확인되었고, 그런 어린아이를 혼란시키지아 않을까 꺼렸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누궁니지도 늘 명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레몽의 얼굴에 남아 있는 어린애다움은 죽은 아들을 상기시켰다. 그래서 상상 속에서조차 마리아는 뜨거운, 그러나 늘 조심스러운 수줍음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레몽이 사라져버린 지금,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금, 마음속에 흘러넘치는 혼란스러운 격류를, 이 어두운 소용돌이를 애써 억누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마리아의 갈증을 풀어줄 과일이 이미 사라져버렸는데, 그 맛을 상상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단 말인가? 


152쪽/ 이 고독한 사랑은 왜 이다지도 매혹적인가? 팽팽하던 긴장 속에서 상대가 사라지고 나자 그 사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자기의 정염의 ㅁ애렬함뿐이었다. 자신 속에 불이 휘몰아치고 있음을 느끼는 것, 오직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깨닫는 것, 때로 이런 고독한 정열이 정상적인 사랑의 교류보다 더 강력하고 매혹적일 수 있음을, 마리아는 배우게 되었다. 더 이상 마리아는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억누르지 않았다, 더 이상 권태롭지도 않았고, 버림받는 느낌으로 괴롭지도 않았다. 오직 뜨거운 불이 그녀의 전부를 차지했다. 


156쪽/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이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대상이! 끝도 없는 혼란과 동요를 다 겪은 지금에야. 그러나 이런 사실이 레몽에겐느 불운으로 작용했다. 말이나느 첫눈에 벌써 환멸을 느꼈다. 의식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오래도록 그리워했고 갈망했던 대상이 실제로 나타났지만, 그가 자기의 엄청난 공허를 채워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단숨에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그녀의 마음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마리아가 말문을 열고 처음으로 내뱉은 말 속에는 이런 실망이 드러나 있었다.
 "미용실에서 막 나온 모양이군요."
 레몽의 짤막한 머리카락은 포마드를 발라 번들거리고 있었고, 이런 모양새가 그녀에게는 낯설었다. 마리아는 소년의 관자놀이 위 희미한 상처 자국을 가볍게 건드렸다.
 "여덟 살 때 그네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예요."
 야윈 듯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명백히 성적 매력을 풍기고 있는 이 아이를 마리아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189쪽/ 자주 인생은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치명적 사건을 일으킨다고, 박사는 생각했다. 사춘기 이래로 그의 사랑의 대상들은 모두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한순간에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버리는 여자도 있었다. 다른 여자는 좀 덜 잔인하게도, 이 지역을 떠나 이사를 가기도 했다. 그녀들은 도시를 떠났고 다시는 편지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존시킨다. 그들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그래서 죽음은 사랑을 썩지 않게 보존하는 소금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로 사랑을 분해시키고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삶이다.
 

196쪽/ 한 여자가 우리 안에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끄집어내어 그걸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고 하자. 가혹한 운명이지만, 이제 우리는 그녀가 만들어낸, 앞으로 절대로 변할 가능성이 없는 그 단단한 상에 영원히 묶이게 된다. 이 화학 법칙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 뒤로, 우리와 만나는 모든 살마들이 우리 안에서 똑같은 이미지를 끄집어낸다. 흔히 그것이, 우리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수치스러운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한 장의 천박한 이미지로 바꿔버리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인가? 그는 우리가 가진 가장 고귀한 미덕들은 지워버리고, 우리의 가장 약하고 우스꽝스러운 악덕에만 밝은 빛을 비춘다……. 오히려, 우리가 전혀 애정을 품지 않았던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는 미덕과 빛나는 재능과 엄청난 힘을 그대로 봐준다. 우리가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우리 얼굴에 새겨진 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감탄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이율배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2쪽/ "베르트랑이 그런 이야길 했어요.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우리의 진짜 인생은 스물다섯이나 서른 이후에야 시작된다고요."
 그러나 레몽은 혼란스러운 상념 속에서도 그 말에 반대했다.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니다. 사춘기가 끝날 때쯤이면 이미, 우리가 인생에서 완수해야만 하는 과업들이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청년기 문턱을 넘어서면, 인생의 게임과 드라마 전체가 완전히 윤곽을 드러내고, 한 번 만들어진 구조는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 이러저러한 충동과 경향성들이 유년기 육체 속에서 태어나 잠복해 있다가, 육체와 함께 성장하며, 사춘기의 순수함과 함께 세련돼 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되는 나이가 되면, 준비된 모든 것들이 갑작스럽게, 괴물처럼 추악한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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