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검은 수사」,『사랑에 관하여』 단편소설 기록


77쪽/ 페소츠키는 회반죽이 군데군데 벗겨진 기둥들과 사자상이 서 있고 현관에는 제복을 입은 하인들이 대기하고 있는 거대한 집에서 살았다. 영국식으로 구획된 고풍스럽고 염격한 스타일의 정원은 어딘지 우울해 보였다. 정원은 집에서 강에 이르는, 1베르스타는 족히 되는 거리 끝까지 이어지다 점토질로 이루어진 가파른 강기슭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 강기슭에는 털이 부숭부숭 난 동물의 발 같은 뿌리를 드러낸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또 그 아래로는 도저한 강물이 외로이 빛나고 도요새들이 구슬픈 소리를 내며 날아다녀, 언제든 발라드라도 쓰고 싶어지는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신 실제 집 주변과 마당, 양묘장을 포함해 대략 30데샤티나에 이르는 과수원에는 형편없는 날씨에도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코브린은 그 어디에서도 페소츠키의 정원에 있는 것처럼 풍성한 꽃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곳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장미와 백합, 동백 그리고 선명한 흰빛에서 카본처럼 검은빛에 이르는 온갖 색상의 튤립이 피어 있었다. 이제 막 봄이 시작되었을 뿐이고, 화려한 아름다움의 정수는 아직 온실에서나 볼 수 있지만, 특히 이른 아침 꽃잎마다 이슬이 반짝일 때 정원을 산책하면, 가로수와 여기 저기 꽃밭에 피어난 꽃들만으로도 알므다운 색채의 왕국에 와 있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페소츠키 자신은 경멸을 담아 시시한 것들이라 불렀던 정원의 다양한 장식물들은 그 옛날 얼니 코브린에게 동화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 속에는 온갖 기이한 변덕과 우아한 추물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 과일나무로 이루어진 담장, 양버들 모양의 배, 공처럼 생긴 떡갈나무와 보리수, 사과나무로 만든 차양, 아치, 두문자들과 샹들리에, 심지어 자두나무로 만든 1862라는 숫자까지 있었다. 이는 페소츠키가 원예를 시작한 해를 뜻했다. 또 야자수처럼 곧고 건장하게 뻗은 아름답고 늘씬한 나무들도 있었는데,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이 나무들에 구스베리나 까막까치밥나무 열매가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85쪽/ 그들이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동안 태양은 이미 높이 떠올라 찬란하게 정원을 비추었다. 날씨도 따뜻해졌다. 밝고 유쾌한 긴 하루를 예감하며 코브린은 지금이 겨우 5월 초이고, 이토록 선명하고 유쾌한 긴 여름이 그의 앞에 온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 속에서 기쁨에 찬 젊은 감성, 어린 시절 이 정원을 뛰어나닐 때 느끼던 그런 감정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는 노인을 끌어안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감격하여 집으로 돌아와 오래된 도자기 잔으로 차를 마셨다. 차에는 크림과 걸쭉한 유제품을 넣은 크렌델 빵을 곁들였는데, 이런 소소한 것들로 인해 코브린은 다시금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떠올렸다. 아룸다운 현재와 이제 막 그의 냄녀에서 되살아난 과거에 대한 감회가 한데 어우러졌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좀 복잡했지만, 좋았다. 
 그는 타냐가 깨어나기를 기다려 함께 커피를 잔뜩 마시고는 산책을 했따. 그러고 나서 자기 방으로 가 일을 시작했다. 그는 주의 깊게 책을 읽으며 메모를 하고 간혹 눈을 들어 열린 창을 바라보거나 책상 위에 놓인 꽃병에 꽂힌, 아직 이슬 젖은 싱싱한 꽃들을 바라보고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내면에서 혈관 하나하나가 만족감으로 떨며 뛰노는 듯했다.


88쪽/ 그는 타냐를 손님들에게 돌려보내고는 집에서 나와 생각에 잠겨 화단 곁을 오갔다. 이미 해가 졌다. 조금 전에 물을 주어 꽃에서는 습하고 불쾌한 향기가 났다. 집에서는 다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는 꼭 사람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코브린은 어디서 이 전설을 듣거나 읽었는지 기억해 내려고 정신을 집중하며 천천히 공원 쪽으로 향했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강가에 다다랐다.
 그는 가파른 강기슭을 따라 난 오솔길을 걸어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 곁을 지나 물가로 내려갔다. 그가 내려가는 바람에 도요새들이 두런대고, 오리 두 마리가 놀란 듯 날개를 퍼덕였다. 아직 채 지지 않은 마지막 태양 빛이 우울해 보이는 소나무 사이로 비쳤지만, 강 표면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다. 코브린은 강가에 놓인 나무 다리를 따라 강 저편으로 건너갔다. 그의 앞에는 아직 꽃도 피지 않은 어린 호밀로 뒤덮인 거대한 평원이 펼쳐졌다. 그곳에는 인적이 전혀 없어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조금 전 해가 져 저녁노을이 광대하고 장엄하게 불타는 저 신비로운 미지의 장소에 가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곳은 얼마나 광활하고 자유로우며 고요한가!'
 코브린은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마치 온 세계가 숨죽여 나를 보며 내가 자기를 이해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바로 그 순간 호밀밭 사이로 파도가 일렁이며 가벼운 저녁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곧이어 다시 바람이 불었는데, 이번에는 훨씬 강했다. 호밀밭이 쉬쉬 소리를 내고, 뒤편에 서는 소나무들의 목쉰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코브린은 놀라서 멈추어 섰다. 


98쪽/ 타냐를 위로하며 코브린은 이 세상을 이 잡드시 뒤져도 이 아가씨와 그녀의 아버지처럼 자신을 혈육같이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찾을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일찍 부모를 잃은 그는 죽을 때까지 진정한 애정, 아주 가까운 혈육에게나 품을 수 있는, 단순하고 비논리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울며 떨고 있는 이 소녀의 신경이 반은 병들고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신경줄에, 마치 철이 자석에게 이끌리듯 응답하는 것을 느꼈다.


106쪽/ 타냐는 사랑과 행복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록 열네 살 때부터 웬일인지 코브린이 그녀와 결혼할 거라고 확신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놀라고 어리둥절한 나머지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 큰 기쁨이 몰려와 구름까지 날아올라 거기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싶은 마음이다가도, 때로는 8월이면 정든 둥지를 떠나 아버지를 혼자 남겨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나고, 또 때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코브린같이 위대한 사람의 짝이 되기에는 너무도 형편없고 부족하며 가치 없는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면 자기 방으로 가 열쇠로 문을 잠그고 몇 시간이나 계속해서 슬프게 울어댔다. 손님들이 오면 갑자기 코브린이 출중한 미남이고 모든 여자들이 그에게 반해 자신을 부러워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럴 때면 마치 온 세상을 얻은 듯 기쁨과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가 웬 아가씨에게 미소라도 한번 짓는 날엔 질투심으로 불타 벌벌 ㄸ러며 자기 방으로 가 다시 눈물을 흘려댔다. 


115쪽/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꽉 감싸 쥐더니 고통스러워하며 말했다. 
"왜, 도대체 왜 당신들은 나를 치료한 거지? 브론산칼륨 약, 게으름, 열탕, 감시, 뭘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노심초사해야 하는 그 소심함, 이 모든 게 결국 날 바보로 만들 거야. 난 미쳤고 과대망상증에 걸렸었지. 하지만 대신 즐겁고 활기차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했어. 난 재미있고 특별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이제 더 논리적이고 더 근엄한 사람이 되었겠지만, 대신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단 말이야. 난 평범함 그 자체야. 사는 게 지겨워……. 아, 당신들이 나를 얼마나 잔인하게 다뤘는지 알아? 그래, 난 환각을 봤어. 하지만 내가 누구한테 피해를 줬나? 대답 좀 해보라고. 그게 누구한테 피해를 줬지?"


117쪽/ 그는 극심한 분노를 느꼈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재빨리 일어나 집으로 갔다. 주위는 고요했고 열린 창을 통해 담배향과 알라파 향이 흘러들었다. 달빛은 거대하고 어두운 응접실 바닥과 피아노 위에 녹색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코브린은 역시 알라파 향이 흘러들고 창가에는 달빛이 비쳐 들던 지난 여름의 황홀함을 기억해 냈다. 작년 기분을 되살리기 위해 서둘러 사무실로 가서 독한 시가를 피워 물고는 하인에게 포도주를 가져오게 했다. 하지만 시가의 맛은 쓰고 끔찍했으며 포도주 맛도 작년 그 맛이 아니었다. 익숙했던 것들로부터 멀어진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시가와 포도주 두 모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심장이 뛰기 시작해 브롬산칼륨을 마셔야만 했다.
 

122쪽/ 그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신경이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위기의 순간에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임을 알았다.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이 되든 하나의 생각에 집중해야만 한다. 그는 빨간 서류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노트네는 그가 크림에서 일이 없어 심심하면 읽으려고 준비한 소규모 편찬물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이 요약문을 읽기 시작했고, 다시금 평화롭고 유순하고 무심한 기분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 노트는 심지어 세상의 헛된 분주함에 대한 생각을 일깨우기까지 했다. 그는 저열하거나 아주 평범한 행복의 대가로 삶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를 생각했다. 마흔이 다 되어 강의 자리를 얻고 평범한 교수가 되어 힘없고 지루하고 어려운 언어로 평범한, 게다가 남의 사상을 이야기한느 것, 한마디로 평범한 학자의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코브린은 15년을 공부하고, 낮이고 밤이고 일하고,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겪고, 차라리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어리석고 부당한 일들을 저질렀다. 코브린은 자시니 너무도 평범한 존재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했고, 이러한 생각과 화해했다. 모든 인간은 그저 자신의 상태에 만족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안톤 체호프, 「검은 수사」,『사랑에 관하여』, 안지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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