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책 기록


11쪽/ "내가 뭘 원하는 것 같아?" 나는 웃음을 입에 문 채 물었다. 여자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질문자인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의지가 잠깐 표정에 나타났다가 곧 얼굴 안쪽으로 사라지면서 짜증으로 바뀌었다.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여자는 벌써 세번째 같은 질문을 하고 있따.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그녀의 문제였다. 세상에는 오직 그 두 가지 선택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그 외의 선택은 있지도 않다는 듯이 그녀는 나를 재촉했다. 하기야 누구에겐들 그것 말고 다른 문제가 있겠는가. 세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취미인 소수의 소피스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한없이 간명하다. 고뇌하는 자의 표본으로 곧장 인용되는 햄릿은 실은 삶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서 생각했던 대가였다. 그는 사느냐, 죽느냐, 하고 묻는다. 그것이 문제다? 그것만이? 어찌 그렇게 간단할 수 있단 말인가? 


37쪽/ "어머니는 형에 대한 기대가 유난하셨죠." 나는 겨우 한마디했다.
어머니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분명히 형을 편애했다. 그러나 그 편애는 형이 받은 부당하고 일방적인 특혜는 아니었따. 형은 매력적인 성정과 뛰어난 자질로 편애를 취득했다. 그는 편애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열등한 동생인 나와의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형이 받은 편애는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다. 일찍부터 열등감은 내 음식이고 음료였다. 나는 형보다 공부를 못했고 운동도 못했다. 얼굴도 형보다 잘생긴 편이 아니었다. 세상이 공평하다는 것을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믿지 않았다. 대학 진학에 실패한 후 도피하듯 지원한 군대조차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나는 절망에 사로잡혔고, 그 절망이 집을 나가지 않을 수 없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형이라면 모를까, 어째 니가 그렇게 심한 난시냐, 하고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은근한 비아냥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가 않았다. 형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월했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했다. 그는 어머니의 기쁨이었고 자랑이었다. 그런 아들이 저렇게 되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나는 어머니를 이해하고도 남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아들을 등에 업고 사창가를 찾아가는 일까지 해야 했을까? 그렇게까지 안타까워해야 했을까? 그렇게라도 해서 아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만족시키려고 한 것일까?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부분에서 나는 이해의 벽을 넘지 못했다.


44쪽/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해. 언제나 여기 멈춰서야 해." 형의 목소리는 밤공기에 젖어 축축했다. "여기 서서 저 울타리 너머의 빽빽한 숲속을 상상해. 하늘을 먼저 차지하려고 경쟁적으로 발돋움하는 키 큰 나무들과 저 안 어딘가에 있을 깊은 동굴을 상상해. 몸비비며 어우러져 사는 나무와 풀 들, 새들과 벌레들, 흙과 짐승들을 상상해. 들어가고 들어가고 들어가면 거기 어딘가에 거대한 물푸레나무가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을지도 모르지. 들어가고 들어가고 들어가면 나도 그 나무를 볼 수 있을까? 나도 저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중얼거리곤 해. 저 속으로 들어가서 하늘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떠받치고 있는 그 거대한 물푸레나무를 만져보고 싶다는 꿈을 꾸곤 해."
 형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무엇인가에 대한 간절한 염원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 한번 내가 데리고 들어갈게, 하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 툭 던진 것은 아무래도 잘한 일 같지 않다. 형이 내 말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경솔한 말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으므로 나는 무안해져서 곧 입을 닫아버렸다. 


60쪽/ 형에 대한 내 감정은 날로 사나워졌다. 그녀에 대한 말 못할 사랑이 간절해질수록 형에 대한 미움도 커졌다. 나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결코 허물이 될 수 없다는 명제에만 편집적으로 집착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은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나아가 바람직한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 나는 사랑의 보편성에 매달렸다. 하나의 관념, 또는 추상화된 사랑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진공상태로 포장되어 있는 사랑이란 없다. 사랑은 언제나 그 사랑이 유발되고 고백되고 실연되는 특별한 상황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랑은 상황 안에서의 사랑인 것이다. 모든 사랑이 특별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을 간과했다. 의도적인 눈감기. 필요가, 혹은 욕망이 어떤 진실에 대해 눈을 감게 하고 새로운 진실을 창출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어째서 허물인가, 무엇이 내 사랑을 당당하지 못하게 만드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나에게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것은 형의 존재였다. 나는, 하필이면 형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하고 묻지 않고, 왜 내 사랑 앞에 형이 장애물로 있는가? 하고 물었다. 모든 생각이 나로부터 비롯하고, 나를 중심으로 돌고, 나에게서 멈췄다.  내가 태초였다. 내가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사랑이 있기 전에는 어떤 사랑도 없었고, 또 없어야 했다. 나의 사랑이 있기 전에 있었던 어떤 사랑도 실체가 아니었다. 실체가 아니므로 인정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의 사랑이 있기 전에는 형의 사랑도 없었고, 없어야 했다.


120쪽/ 나는 그녀의 둥글게 굽은 어깨에 손을 얹고 싶었다. 그녀의 굽은 어깨를 가만히 토닥거리며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고, 삶이란 생각보다 엄숙하지도 않고 기대처럼 정연한 것도 아니라고, 맑았다가 흐리고, 비가 오다 해가 뜨는 거라고, 그런 게 삶이라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모했다. 자꾸만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꾸만 형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를 제지했다. 복받쳐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흐느끼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나는 조용히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곳을 떠나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형이 다시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형이 다시 사진을 직도록 도와주세요." 그녀는 어릿어릿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았다.


146쪽/ 일부가 전부라는 격언은 이 경우에 맞춤하게 들어맞는다. 공개되지 않았떤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부를 공개하는 것과 같다. 공개되지 않은 일부는 공개된 전부보다 항상 크다. 


215쪽/ 그녀는 답답한 듯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햇빛이 열린 창문으로 투명한 손을 집어넣었다. 차창에 붙은 하루살이들의 날개가 은색으로 반짝였다. 그것들은 햇빛을 받아 몸을 뒤척이는 싱싱한 아침 바다를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근처에 바다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 순간 문득 들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 염분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꿈 이야기가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는 건 자명했다. 이상한 꿈이라는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 있던 불안정한 정서가 어느새 나에게 전이된 것일까, 나의 감각은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예민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막연하게 예감하고 있는 것의 실체를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의 꿈은 나의 해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꿈을 꿨고, 나는 그 꿈을 해몽할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의 꿈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꿈 밖에서 해몽을 할 뿐이었다. 나는 단지 해몽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 단지 그녀의 꿈을 해몽하기 위해 내가 그곳에 있다는 생각은 나를 갑자기 비참하게 했다. 나는 문득 누더기를 걸친 것 같은 수치심을 피할 수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250쪽/ 형에 대한 연민이 왈칵 솟구쳐올랐다. 나는 형의 괴로움과 슬픔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나의 이해는 부분적이고 빈약했다. 형이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을 포기했다는 것은 아주 나쁘지 않았다. 정말로 나쁜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의 자리 찾기를 포기한 자신을 견딜 수 없어하고 괴로워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소망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자리 찾기를 포기하고 만 자신을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을 초월의 정신이거나 무감각이었을 거라는 생각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은 존재의 변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지금의 존재를 버리고 전혀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그의 변신에 대한 꿈은 얼마나 크고 절망적인 욕망인가. 존재를 건너뛰려는 욕망만큼 큰 욕망이 어디 있는가. 욕망을 지우려는 욕망만큼 절망적인 욕망이 어디 있는가.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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