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스콧 피츠제럴드 < 위대한 개츠비> 책 기록

11쪽/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한마디 했는데 아직도 그 말이 기억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말이 훨씬 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 부자는 말 한 마디 없이도 서로의 뜻을 이상하리만치 잘 알아차리곤 했다. 그후로 나는 모든 것에 대해 판단을 미루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때문에 유별난 성격의 소유자들이 툭하면 나에게 접근해왔고, 따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간들로부터 적잖이 시달림을 받았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비정상적인 특징이 나타나면, 비정상적인 정신은 얼씨구나 하며 잽싸게 달라붙게 마련이다. 억울하게도 대학시절에는 정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별로 친하지도 않은 껄렁한 놈들의 은밀한 슬픈 사연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은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찾아와 주절거린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내밀한 고백을 하려는 기미가 확실하다 싶으면 종종 자는 척, 뭔가에 몰두해 있는 척했고, 때로는 곁을 주지 않으면서 함부로 대했다. 젊은 친구들의 고백, 혹은 그 고백의 말이라는 게 잘해봐야 남의 것을 표절한 것이고, 그 사실을 억지로 숨기려다보니 대개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게 마련이다.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아버지가 점잖빼며 말한 바 있고 나 역시 똑같은 태도로 다시 반복하지만, 인간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품위는 실은 날 때부터 사람 나름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다른 뭔가를 놓칠 수도 있다. 

17쪽/ 데이지의 남편 톰은 여러 가지 운동에 재능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예일 대학 미식축구 역사상 가장 힘 좋은 엔드 중 한 명이었으며, 그것으로 전국적 명사가 되었다. 스물한 살 때에 이미 오를 수 있는 곳까지 다 올랐기 때문에 그뒤로는 모든 것이 그저 내리막길처럼 보이는 그런 유의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굉장히 부유했다. 이미 대학시절부터 헤픈 씀씀이로 세간의 빈축을 살 정도였지만 그는 여봐란 듯이 시카고를 떠나, 남들이 보면 숨을 딱 멈출 정도로 거창하게 폼을 잡으며 동부로 옮겨왔다. 예를 들어 폴로 경기를 하겠다며 레이크 포리스트에서부터 폴로용 말을 한떼나 몰고 온 것이다. 내 또래의 젊은이가 그 정도로 부유하다는 건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다. 
 그들은 왜 동부로 왔을까? 그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프랑스에서 일 년을 빈둥거렸고, 그후에는 폴로를 할 줄 아는 부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즐겼다. 이게 마지막이야. 데이지는 매번 수화기에 대고 다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데이지의 속내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톰이 이제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미식축구 선수 시절의 드라마틱한 흥분상태를 그리워하며 영원히 방황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1쪽/ 나는 데이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지막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음성은 뭐랄까, 귀가 따라가며 알아서 맞춰 들어야 될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음정들의 배열 같았다. 빛나는 눈동자와 정열적으로 빛나는 입, 그 눈부신 광채로 그녀의 얼굴은 처연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반면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좋아해본 남자라면 잊기 힘든 어떤 흥분 같은 것이 실려 있었다. 음악적인 충동과 속삭임—'한번 들어볼래요?'—방금 즐겁고 신나는 일을 해치웠으며 곧이어 또다른 즐겁고 신나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약속.


76쪽/한동안 나는 미스 베이커를 만나지 못했다가 한여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엔 그녀와 이런저런 자리에 다니는 게 꽤나 즐거웠다. 그녀는 모두가 알아보는 골프 챔피언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사랑에 빠졌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다정한 호기심이랄까 하는 것이 생겼던 것이다. 겉으로 내보이는 무심하고 거만한 표정 너머에 뭔가가 감추어져 있었다. 허세라는 게, 처음부터는 아니겠지만 결국 뭔가를 은폐하게 마련이다. 어느 날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워릭의 어느 집에선가 열린 파티에 함께 갔을 때, 그녀는 빌린 차를 덮개를 열어놓은 채 빗속에 세워놓고는 그것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갑자기 나는 데이지네 집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야기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참가한 메이저 골프 대회에서 하마터면 신문에 날 뻔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준결승전에서 그녀가 나쁜 자리에 놓여 있던 공을 슬쩍 옮기려 했다는 의혹이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스캔들로 비화될 뻔했지만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진술을 뒤집었고 그밖의 유일한 목격자가 자기가 잘못 본 모양이라고 물러섰다. 그러나 그 사건과 이름은 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조던 베이커는 본능적으로 영리하고 똑독한 사람을 피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녀가 사람들이 규범을 일탈할 기회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곳에서만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는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교정이 불가능한 거짓말쟁이였다. 그녀는 작은 손해도 견디지 못했고, 따라서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상을 향해 냉담하고 거만한 미소를 짓는 동시에, 그 단단하고 활기찬 몸을 만족시키기 위해 상당히 어렸을 적부터 속임수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77쪽/ "차 험하게 모시네요." 나는 항의했다. "좀 조심하든가 아니면 아예 몰지 마세요."
"조심하고 있어요."
"당신이? 아닌데요."
"나 말고요. 다른 사람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다른 사람들이 비킬 거라는 거죠." 그녀가 우겼다. "사고가 나려면 최소한 둘이 있어야 되잖아요."
"당신같이 부주의한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요?"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지요."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부주의한 사람들을 싫어해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예요."
 태양빛에 지친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앞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그녀는 슬쩍 우리 관계를 격상시킨 것이었고, 그 때문에 나는 잠깐 동안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느리고 욕망에 브레이크를 거는 내면의 규칙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우선 고향에 팽개치고 온 애매한 관계에서 확실히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편지를 썼고, 그때마다 "사랑하는 닉이."라고 적었지만, 그러나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녀가 테니스를 칠 때면 마치 콧수염처럼 윗입술 위에 땀이 어리는 모습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몸이 되자면, 상대와의 관계를 요령껏 잘 정리해줘야만 한다는 막연한 협정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는 있었다. 
 모든 사람은 여러 주요한 미덕 중에서 최소한 한 가지쯤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싶은데, 내 경우에는 이것이다 :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정직한 사람들 중의 하나다.


116쪽/ 그의 정신은 두 단계를 지나 이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최초의 당황과 놀라운 기쁨이 지나고, 그는 그녀의 출현이라는 기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너무도 오랫동안 이 순간을, 이를 악문 채, 말하자면 믿을 수 없는 집중력으로 꿈꾸어왔던 것이다. 이제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너무 많이 감아놓은 시계태엽처럼 서서히 풀려가는 중이었다.
 잠시 정신을 차린 후, 그는 두 개의 엄청난 에나멜 장롱을 열어 보였다. 산더미 같은 양복과 실내복, 넥타이가 걸려 있었고, 셔츠가 한 다스씩 마치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영국에서 옷을 사서 보내주는 사람이 있거든. 봄 가을 시즌이 시작될 때마다 엄선해서 보내준다고."
 그는 셔츠 더미를 끄집어내 우리 앞에서 하나하나 펼쳐 보여주었다. 얇은 리넨과 두꺼운 실크, 질 좋은 플란넬 셔츠들이 테이블 위로 던져져 다채로운 색깔로 뒤엉켰다. 우리가 감탄할 때마다 그는 더 많은 셔츠를 가져왔고, 이 부드럽고 사치스러운 언덕은 점점 더 높아만 갔다. 문장이 새겨진 줄무늬 셔츠, 산홍빛의 체크무늬 셔츠, 사과빛 푸른 셔츠, 인디언 블루의 이니셜이 새겨진 라벤더빛 혹은 연한 오렌지빛의 셔츠들, 그 순간 갑자기 데이지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셔츠 더미에 파묻고 격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그녀가 흐느꼈다. 두터운 셔츠더미에 팜두혀 그녀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너무 슬퍼. 한 번도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본 적이 없거든."


219쪽/ 내가 동부를 아주 좋아했던 순간조차도, 지루하고 끝없이 팽창할 줄밖에 모르는 오하이오 너머의 도시들, 애들과 노인을 제외한 모두가 서로에 대한 끝없는 취조로 세월을 보내는 그 한가로운 마을들을 넘어서는 동부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었을 때조차도, 동부에 대한 나의 인상에는 어떤 왜곡이 있었다. 특히 웨스트에그는 여전히 나의 꿈속에 몽환적인 모습으로 출현하곤 한다. 엘 그레코가 그린 밤 풍경처럼. 전통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수백 채의 집, 그 위에 펼쳐진 음산한 하늘과 칙칙한 달. 그림의 전경에는 연미복을 입은 심각한 얼굴의 남자들 넷이 흰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술에 취한 여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들고 보도를 따라 걸어간다. 들것 옆으로 비어져나와 흔들리는 여자의 손에선 보석들이 차갑게 번쩍인다. 남자들은 장중한 태도로 어떤 집으로 들어가지만, 거기가 아니다. 아무도 여자의 이름을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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