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A가 X에게-From A to X: A story in Letters』 책 기록

p.32 
"아니, 우리는 누군가를 따라잡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 낮이나 밤이나, 동료 인간들과 함께. 모든 인간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 행렬이 앞뒤로 너무 길어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뒤에 선 사람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점점 더 드물게 만나고, 점점 더 드물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위의 구절을 외웠던 기억이 난다. 두리토에게 누구의 말이냐고 물었더니, 아마 파농인 것 같다고 했다.


p.51
이미 이별이, 버릇없는 원숭이처럼, 창가에 매달려 있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역시 내게서 본 뭔가에 대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는 자신의 상실감과 나의 상실감을 비교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가 살아온 집과 이제 폐허가 되어 버린 주변의 다른 집들을 비교했어요. 모두 비슷한 크기였죠. 침실 두 개, 거실 하나, 열세 개의 모퉁이와 천한 가지의 비밀. 폐허가 된 집들은 더 작아 보이네요. 집안에는 라디오가 켜져 있었어요. 여자 가수였죠. 세자리아 에보라. 그와 대조적으로 폐허가 된 집들은 조용했어요. 마치 에보라의 목소리가 그 폐허가 된 집들은 조심조심 피해 가는 것만 같았죠.
 그는 커피나 한 잔 하고 가라면서 라디오를 껐어요.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그녀가 죽은 게 아닌 순간들 말이죠. 그가 커피를 홀짝이며 말하더군요. 날이 밝으면 그 순간들도 늘어나지요. 하지만, 매일 하루는 그녀의 부재로 시작합니다.
 내겐 그게 진실이 아니에요. 나의 하루는 당신의 부재로 시작하지 않거든요. 그건,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을 하기로 했던, 우리가 함께 내렸던 그 결정으로 시작해요.

p.57
모든 사랑은 반복을 좋아해요. 그것은 시간을 거부하는 것이니까요. 당신과 내가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p.67
카산드라 윌슨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고 있다.

"나는 단지 해가 질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뿐이에요.
그것뿐이죠.
나는 단지 해가 질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뿐이에요.
더 이상은 바라지 않아요."

p.73
당신이 내게 낙하산을 메어 주었어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낙하산 줄의 길이를 맞춰 주고, 말아서 접은 다음 버클을 채워주는 그 일은,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의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고 옷을 벗기는 일과 그리 다르지 않았어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직면하기 전에 어떤 집중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말이에요. 
 가슴 주변은 너무 단단하게 묶으면 안 돼, 당신이 말했어요. 가슴을 움직여야 하니까, 하지만 다리 사이는 꼭 묶어야 하지. 나는 항공용 바지를 입느라 좀 애를 먹었어요.
 낙하산 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워 하지만 항공기에서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중략...)

천천히 회전할 거야, 당신이 내 머릿속에서 말했어요. 방향을 바꾸지는 않고, 고도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삼백육십 도 회전하는 거야, 나사처럼. 준비됐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얼마간은 그대로 비행했어요. 당신은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기다리는 당신의 모습을 사랑해요, 특정한 순간을 선택하는 당신만의 방식을 사랑해요. 우리 비행기보다 한참 높은 곳에 제트기가 날고 있었어요. 동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이 파란 하늘에 반투명한 흰색 구름처럼 남아 있었죠. 그건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우리 앞의 뭉게구름과는 다른 흰색이었어요.

p.85
새벽 세시에 잠이 깼어요. 빛은, 어디에 떨어지든 상관없이, 회색재처럼 보였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나 자신도 이유를 모른 채, 거리로 나갔죠. 가로등도 꺼져 있었어요. 습관적으로 약국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죠. 가던 길에 여우를 한 마리 발견하고는 베드를 떠올렸어요. 밤은 더 친절하다고, 그가 말했었죠. 오늘은 아니야, 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어요. 오늘 밤에는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보인다고. 
 
p.91 
그리고 오늘 아침에, 오늘은 약국에 안 나가는 날이었거든요, 그 의자를 고쳐야 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접착제는 벌써 사 두었죠. 민들레 줄기의 진액처럼 끈적거리는 흰색 접착제예요. 부서진 의자를 뒤집어서 앞에 놓고 다른 의자에 앉았죠. 망치와 드라이버, 헝겊 조각도 준비했어요. 헝겊 조각은 올가가 입던 패딩 코트의 소매 부분을 뜯은 거였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는 분명했죠. 일단 뺄 수 있는 조각은 다 분해했어요. 구멍에서 빠지지 않는 부분은 그냥 둬도 될 만큼 튼튼하다고 생각했죠. 그런 다음 모든 구멍은 물론 다리와 버팀목 끝에까지 접착제를 발랐어요. 조각들을 다시 제 위치에 맞추고, 끝을 다듬고 구멍에 끼운 다음 다리부터 망치질을 했죠. 접착제를 바른 나무가 망치질에 상하지 않게 누더기로 쌌어요. 모든 조각들이 제대로, 완벽하게 자리잡았어요. 나는 의자를 다시 똑바로 세우고 바라보았죠. 그때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내가 울기 시작한 거예요. 얼마나 울었는지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손에 묻은 접착제를 씻어내고 세수를 했어요.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의자는 똑바로 놓여 있었어요. 모든 것이 제대로 붙어 있고, 이제 구멍에서 흘러내린 접착제를 올가의 코트 소매로 닦아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죠. 그것까지 닦아내고, 나사 세 개를 조인 다음 의자를 창가에 두었어요. (우리가 함께 지붕 위의 고양이들을 내다보던 그 창문이요) 접착제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이틀을 기다렸다가,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죠.
 왜 눈물이 났던 걸까. 의자를 고치는 건 이렇게 쉬운데 나머지 일들은 너무 어려워서? 아니면 이젠 의자 고치는 일 같은 걸 당신에게 부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당신에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죠.


p.95
젊은이들은 현재 자신들이 아는 걸 그 누구보다 생생하고, 강렬하고, 정확하게 알아요.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부분에서는 전문가예요. 나머지 부분은 우리가 보여줘야 하는 거겠죠. 어쩌면 항상 그런 식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승리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투쟁에는 끝이 없으며,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투쟁을 계속해 나가는 것만이, 삶이 우리에게 준 커다란 선물을 알아보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거겠죠! 
 그들이 당신을 잡아가기 전에는 미래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았어요. 부모님 세대는 우리가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하셨겠죠. 우린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그들이 당신을 잡아간 다음부터, 미래는 항상 나와 함께 있어요.


p.101
그녀는 삶이란 하나의 사고일 뿐이라고,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을 주워 들고 어떻게든 다시 붙여 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지내며 나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내 팔을 떨쳐낸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떠나고, 그 뒤로 문이 휑하니 열려 있었어요. 나는 밖으로 나가 계단 맨 위에 앉았어요. 이미 그녀는 보이지 않았죠. 유칼립투스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고, 내가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났던 건 나 역시 삶이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고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자문해 봤어요. 앉은 채 흐느꼈죠. 창피하고 내가 불쌍했어요.
 이틀 밤이 지나고 니닌하가 다시 찾아왔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시늉을 해보였어요. 그러더니 카세트플레이어—산 사진이 붙어 있는 그 모퉁이에 그대로 있답니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시디를 한 장 넣었어요. 그런 다음 거기에 서서, 손을 엉덩이에 댄 채, 기다렸죠. 탱고, 피를 끓게 하는 숙명적인 느낌의 곡이었어요. 그녀가 춤추기 시작했어요. 나를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스텝을 밟으며 나아가는 방향을 보니 내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어요. 
 탱고는 삶의 파편들, 우연한 기회로 살아남은 토막들로 이루어져요. 토막이나 조각들이 한데 모여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다리가 되고, 점점 흐르는 피에 순응하며, 갈라졌다 다시 만나죠. 
 

p.144
꿈을 꿨다. 우주가 한 권의 책처럼 펼쳐졌다. 나는 그 책을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페이지 맨 윗부분 모서리가 표시를 해 두기 위해 접혀 있었다.
그렇게 접힌 작은 삼각형에 구체성의 비밀이 적혀 있었다.
그 비밀은 프랙털 도형처럼 우아하고 완전무결했다.

꿈에서 그 문장 덕분에 다시 확신을 얻은 나는, 너무 행복해서,
받아적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p.176
지난주 금요일은 잔인할 정도로 더웠어요. 사십 도가 넘었죠. 삼십 분마다 물을 들이켰는데, 저녁이 되자 하늘이 금속 같은 빛을 띄었고, 우리는 폭풍우가 닥치기를 기다렸어요. 그건 갑자기 찾아왔죠. 어쩌면 우리는 직접 닥쳤을 때도 그다지 놀랍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죠. 그때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비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어요.
 난 그때까지 약국에 남아 있었는데,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가 먹을 것만 같았죠. 정말 무거운 빗소리는 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함께 오마 다리를 건널 때 당신이 말했잖아요.
 나는 문 앞으로 가 공터를 내다봤어요. 땅에선 노란 빗물이 튀어오르고 하늘에선 회색 비가 열린 수문으로 쏟아지는 물처럼 떨어지고 있었죠. 온 세상에 비밖에 없었네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견딜 수 없는 욕망이 생겼어요. 그건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거든요. 우리는 하루하루를 이런저런 측정할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잖아요, 안 그래요? 당신 생각을 했고,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 홍수 같은 큰 빗속으로 걸어나와 약국 문을 닫았죠.


p.183
포기가 포기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선물이 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걸 이해한다면, 우리에겐 두려움도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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